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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찐니 Nov 17. 2022

수능일 아침의 단상

티격태격 변호사 가족의 일상

94년 수능날 아침, 차 안에서 친정엄마가 성경말씀을 읽어주시고 기도도 해 주셨다. 마음이 든든했다. 청심환도 하나 먹으라고 입에 넣어주셨다. 그래선지 밥 먹고 나서 졸음이 오는 바람에 과학시험 시간에 꾸벅꾸벅 졸았다.

망친 줄 알고 반 친구들이랑 같이 울고불고했는데 알고 보니 전교 1등 점수가 나왔다. 애들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평소 나보다 성적이 좋은 친구들이 많았는데, 아마 그해 수능이 조금 쉽게 나와 그랬던 것 같다.


불수능이 아닌 시절이라 동아리 활동도 하면서 운 좋게 수능성적도 잘 받을 수 있었을 거다. 과외도 못 받았고 영어는 기본 문법만, 수학정석도 기본만 풀었다. 요즘 같으면 택도 없었을 일이다.


집 근처가 학원가라 주말이고 평일 밤이고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오가는 아이들을 많이 본다. 나름 지방의 대치동이라 그렇다. 엊그제 낮이 짧아져 컴컴한데 초등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엘리베이터를 탔길래, "학원 갔다 오는 거야?  어두운데 안 무서워?" 했더니 괜찮다고 한다.


기특하다고 칭찬하고 집에 들어오니까 울 애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유튜브 보겠다고 아이패드 비번 열어달랜다. 아이고 이놈들아. 이럴 땐 힘들게 학원이라도 돌려야 되나 잠시 망설여진다.


대신 울 애들은 아직 스마트폰이 없다. 엄마가 힘든 학원은 안 보내지만 스마트폰만은 대학 가면 사줄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학원 가기 싫어 그런지 고분고분 고물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순둥이들이다.


그래도 건강하게 해맑게 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마냥 사랑스럽기만 하다. 사춘기 중2 아들은 본인이 그린 만화 컷을 웹툰 파일로 만들어 줬더니 나를 존경과 사랑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심지어 어제는 볼뽀뽀까지 해줬다. 가 이래 봬도 중2 아들한테 볼뽀뽀받은 엄마다!


물려줄 사업체도 없고 상가도 없으면서 이런 여유 무엇? 일하느라 바빠 애들이랑 공부 가지고 아웅다웅 까지 할 체력이 없어 그런 것 같다. 꼭 그렇게 애들을 몰아쳐야 되나 세상에 대한 반항심도 조금 있다. 그렇다고 외국서 공부시킬 형편도 안되니 정신승리라도 할 수밖에 없다.


정신승리를 하려면, 이렇게 안 시켜도 울 애는 잘할 거야가 아니라, 잘 안 해도 상관없어가 되어야 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꼭 서울에 있는 대학에 안가도 되거나 꼭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야 다.

속는 셈 치고 한번 해보시길 권한다.

애들이 진짜 사랑스러워 보인다. 진짜다.


수능일 아침 엄마가 읽어주셨던 성경말씀으로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해 본다.


6 강하고 담대하여라. 내가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한 그 땅을 네가 이 백성들에게 유산으로 나눠 줄 것이다.

7 오직 마음을 강하게 먹고 큰 용기를 내어라. 내 종 모세가 네게 준 율법을 다 지켜라. 그것에서 돌이켜 좌우로 치우치지 마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잘될 것이다.

(수 1:5-7_우리말 성경)


사진은 94년 저의 고3 교실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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