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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멘, 맛은 시간을 만나 맛있는 추억으로 발효된다

내가 오사카의 밤을 기다렸던 이유.

by RNJ
오사카의 킨류라멘


막차까지 시간 좀 남았는데 포장마차 어때?


번화가에서 막차를 타러 가기 전, 배가 출출하면 친구들과 포장마차에 들려 우동 한 그릇을 먹곤 하였다. 늦은 밤 포장마차에 들어가면 오돌뼈에 소주 한잔을 하고 계시는 어르신들, 아이를 데리고 야식을 먹으러 나온 가족, 그리고 나와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로 가득했다. 하루의 끝에서 아쉬움을 허기로 채우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포장마차였다. 추운 날씨에 우동 한 그릇이면 속을 든든하게 채울 수 있었고 사장님들은 초록빛 소주병을 흔들면서 유혹(?)을 하시곤 했다. 물론 가끔 못 이긴 척 넘어가 막차를 놓치기도 하였다. 그런 날은 사장님 특제 요리들을 맛볼 수 있어 행복했다('사장님 때문에 막차 못 탔어요, 서비스 많이 주세요!'). 요새처럼 추운 날씨에는 포장마차의 따끈따끈한 우동이 생각나곤 한다.




나의 일본 여행, 그리고 일본의 소울푸드 '라멘'


오사카를 여행하면서 좋았던 점은 어디를 가나 따끈한 라멘을 파는 라멘집들이 도처에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치란 라멘부터 이름 모를 수많은 라멘 가게들이 집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이들의 발과 코를 붙잡는다. 가게 안은 육수에서 피어오르는 뽀얀 김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미 가게 안은 허기를 채우는 직장인들과 여행객들로 가득하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포장마차나 터미널 근처 24시간 해장국집과 같은 분위기가 아닐까. 번호표를 받고 티브이를 보며 나의 라멘을 기다렸다.


일본 라멘을 주문할 때는 선호하는 토핑, 국물, 면을 주문서에 적어 내거나 주문할 때 따로 요청해야 한다. 그러면 잠시 후 나만의 라멘을 맛볼 수 있다. 일본 음식점들은 대체로 개인의 취향을 고려한 맞춤형 음식을 제공하는 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이러한 점이 일본 음식점을 특별하게 만드는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잘 몰랐던 나의 취향을 찾아갈 수 있다는 점이 나의 마음에 쏙 들었다. 나는 파와 부추가 듬뿍 들어간 진한 고기 국물 라멘을 좋아한다. 오사카의 킨류 라멘은 양념된 부추를 넣어먹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일본인들은 면의 식감을 중요시하고 한국인들은 국물의 맛을 중요시한다고 한다. 일본 식당은 면을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쓰는 편이고 한국식당은 맛있는 육수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쏟는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른 점도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한국에서는 국물이 맛있어야, 일본에서는 면이 맛있어야 식당에 사람이 몰린다.


간단한 찬거리와 함께 라멘을 받아 자리에 앉은 후, 먼저 국물부터 한 술 뜬다. 진한 육향에 저절로 미소가 번지고, 곧이어 탱탱한 면발을 젓가락으로 끌어올린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내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시간에 먹는 것이 참 좋다. 자이 다 되어갈 무렵 사람들이 북적이는 가게 안에서 라멘을 먹는 것. 늦은 저녁에 먹는 라멘은 하루의 일정이 끝났다는 의미이자, 그날 여행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시장 앞 거기 알지? 000 앞으로 나와. 김치 우동먹자.


어린 시절, 아버지는 가끔 퇴근길에 가족들을 동네의 작은 술집으로 부르곤 하셨다. 나를 유난히 이뻐하셨던 가게 아주머니를 보러 가는 것도 좋았고, 가족들과 함께 김치 우동과 꼬치요리를 먹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 나는 가족들과 행복했던 추억을 꼽으라면, 함께 김치우동과 꼬치요리를 먹었던 술집이 생각난다. 특별한 순간이 아니더라도 오래 기억에 남는 행복한 추억들이 있다. 사람이 생각나고 추억이 떠오르는 그런 맛과 순간들.


맛은 시간을 만나 맛있는 추억으로 발효된다.


훈련소 종교활동에서 먹은 초코파이와 행군 중에 먹은 단팥빵,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끓여먹은 팅팅 불은 라면, 중학교 졸업식날 먹은 우럭구이(자장면이 아니라?)까지. 때로는 소소한 순간들이 오래 기억에 남고 시간이 지나면 특별한 추억이 된다.


행복한 추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김치가 익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배추가 맛있는 양념을 만나 잘 버무려진 후, 오랜 시간 발효가 되면 맛있는 김치가 된다. 마찬가지로 행복한 순간이 맛있는 맛과 잘 버무려지면 시간이 지난 후 감칠맛 나는 추억이 된다. 갓 담근 김치는 겉절이처럼 풋풋한 맛과 아삭한 식감을 주고, 오랜 기간 잘 묵힌 묵은지에서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다. 추억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가 언제 그 추억을 꺼내먹느냐에 따라 매번 새로운 추억을 맛볼 수 있다. 맛은 시간을 만나 더욱 맛있는 추억으로 발효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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