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다녀오신 분이라면 아침마다 울리던 '기상나팔소리'를 기억하실 겁니다. 아침이면 우리의 정신을 번쩍 깨워주는 나팔소리.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그 경쾌한 멜로디, 아마 아직도 기상나팔소리가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분들이 제법 있을 겁니다. 저는 국군의무학교에서 기상나팔소리를 처음 들었는데, 제가 23개월 복무한 해군에선 육군과 다른 독특한 기상 방송이 있습니다.
바로 '총 기상 15분 전' 해군은 15분 전, 5분 전이라는 특이한 문화가 있습니다. 함정 생활을 하는 해군은 '0 (시간/분) 전'이라는 방송을 하는데 '출항 1시간 전'이라는 방송이 나오면 출항 준비를 시작하고 '출항 15분 전'이라는 방송이 나왔을 때는 이미 출항 준비가 완료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출항 5분 전'은 배가 출항한다는 의미입니다. 거대한 함정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승조원 모두가 각자 맡고 있는 업무를 제시간에 맞추어 해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문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기상방송도 '15분 전 방송'이 나온다는 겁니다. 총 기상 15분 전이니깐 15분 동안 알차게 잠을 자면 되느냐? 절대 아닙니다. 15분 전 방송이 나올 때쯤은 옷을 다 입고 집합장소로 후다닥 달려 나가야 합니다. 5분 전에는 모든 대원들이 기상하여 집합장소에 정렬을 완료해야 합니다.
짬이 없을 때는(짬이 없다는 표현은 부대에 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병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방송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육군의 나팔소리처럼 꽤 오래 울려주면 좋겠지만, 해군의 방송은 '총 기상 15분 전, 영내 승조원 00에 집합' 속사포 같은 랩 한마디에 끝나 버립니다. 선임들이 나를 흔들며 '안 일어나냐?' 하는 순간 오늘 하루는 꼬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런 날은 '하루가 언제 끝나나...'라는 생각에 하루 종일 괴롭습니다.
저는 전역을 하고 기상방송을 다시는 들을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고시원에 들어오고 나서 이곳에도 기상나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옆방 알람 소리입니다(무시무시한 벽간 소음). 고시원은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력사무소는 이른 아침 출근해야 일자리를 얻을 수 있기에 이곳에는 새벽같이 일어나는 분들이 많고, 야간 교대근무를 나가시는 분들은 한밤중에 출근을 하시기도 합니다. 문제는 고시원은 방음이 안된다는 점. 알람이 옆방 사람들도 같이 깨워버린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혹여나 알람을 듣지 못하고 계속 자게 된다면, 옆집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며 깨우는 상황이 벌어지곤 합니다(문 두드리는 소리가 상당히 살벌합니다).
그래서 고시원에 필요한 아이템 중 하나가 바로 이어 플러그, 귀마개입니다. 알람 소리를 듣고 곧바로 눈을 떠서 10초 만에 알람을 끈다면 상관없지만, 하루하루 켜켜이 쌓인 피로가 쉬이 풀리지 않는 날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꽤 오랜 시간 알람이 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눈이 번쩍 떠지는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그럼 저도 모르게 '어떤 놈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론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어제 유난히 힘들었던 하루를 보냈구나'. 남 들으라고 일부러 알람을 켜놓겠습니까. 그분도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어제의 피로가 야속하게만 느껴지겠죠.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 스스로 변화하고 대처하는 수밖에 없죠('계란판으로 방음벽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만, 열심히 계란을 먹어가며 계란판을 방에 두르려면 1년은 족히 걸릴 것 같더군요. 포기했습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귀마개를 끼고 자본적이 없는데 고시원에 와서 첫날에 호되게 당하고, 매일같이 이어 플러그를 끼고 자고 있습니다. 처음엔 이어폰을 끼고 잤는데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면 이어폰 줄에 얼굴이 감겨있곤 헸습니다(자면서 무얼 하는 건지...). 군대에서 사격할 때나 사용했던 귀마개를 이곳에서 다시 끼게 되었네요. 그러고 보니 이번 글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군대 이야기만 신나게 한 것 같네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