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에 무드가 어디 있어?
고시원과 무드. 붙여놓아도 따로 노는듯한 이질적인 단어들. 이곳저곳에 곰팡이가 슬고, 도저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자투리 벽지가 이리저리 덧대여 발라진 방을 두고 더티 플레이팅, 아니 더티 인테리어라고 부르곤 했다. 예술과 졸작은 한 끗 차이라 하니 이 얇은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고시원 셀프 인테리어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홀로 보내는 지루한 여가 시간,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오른손을 무상으로 징발하여 지저분한 벽지에 붙일 그림을 하나씩 그렸다. 집안을 그림으로 뒤덮은 모드 루이스처럼.
가끔 들리던 고시원 인근 카페에는 해바라기 그림과 사진이 곳곳에 붙어있었다. 사장님은 “해바라기 그림을 걸어 놓으면 좋은 에너지랑 돈이 들어온데!”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지만 커피 한잔만 시킨 것이 미안할 정도로 가게에는 손님이 없었다. 해바라기를 주야장천 그렸지만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반 고흐가 떠올랐다. 상황이 어땠든 사장님은 항상 밝고 쾌활했다(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횟수가 조금 늘어난 것 같긴 했다). 좋은 에너지는 분명히 굴러들어 온 것 같았는데.... 밑져야 본전이니 해바라기 한 점을 그려 벽에 붙여보기로 결심했다. 밝고 화사한 해바라기가 고시원 벽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 검정펜 하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방의 분위기를 바꾸려고 시작한 그림은 나도 모르는 사이 이곳의 풍경에 동화되고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별이 빛나는 밤'을 배경으로 빌려왔는데... 고시원이 한층 더 우울해지고 말았다.
시작이 반이라고, 시간이 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그림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소소한 시도에 게으름이 더해진 덕분에 곰팡이로 얼룩진 벽 한쪽을 덮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2~3평 남짓한 골방에서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최고의 인테리어는 바로 싸구려 그림 갤러리였다. 나를 향해 쏟아질 듯 서있었던 벽에 하나의 숨구멍이 트였다! 답답하고 위압적으로 느껴졌던 얼룩진 벽이 어느 순간 가장 즐겁고 넓은 벽으로 바뀌어있었다. 벽에는 바다와 산과 하늘과 이야기가 생겼다. 최소 공간, 최대 효율. 골방 공리주의자의 첫 시도는 소소한 성취로 마무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캠핑용 조명이 하나 추가되어 작은 프라이빗 갤러리가 완성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전시하고 감상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큰 즐거움을 느꼈고, 고시원을 벗어난 이후에도 종종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러다 운이 좋게도 제주도 예술가들과 단체 전시회를 개최하여 관람객들과 소통하는,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곰팡이가 핀 벽지를 숨기기 위한 노력은 나의 그늘 속에 머물던 오래된 꿈을 되찾게 해 주었고 화가라는 새로운 도전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책가방에 교과서는 없어도 항상 스케치북을 넣어 다니는 아이였다.
빛과 어둠의 대비가 어느 곳보다 강렬한 고시원에서 만들어진 나의 창작 경향은 명확하고 간결한 펜과 연필 사용에 집중되어 있었고, 지금까지도 별다른 색깔 없이 흑선과 하얀 여백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너무나 친숙한 인상파의 그림보다 콜비츠의 판화를 더 좋아하게 된 이유도 그녀의 작품이 내가 더 깊게 공감할 수 있는 색감과 정서를 공유하기 때문이 아닐는지. 고시원이라는 이름과 편견에 갇힌 탁하고 습한 장소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고시원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다시 깨달았다.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말을 남겼다. 인간은 집을 만들고 집은 인간을 만든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결정하고 구성하며 우리는 그 선택의 일부를 스스로에게서 다시 발견한다. 내가 일어나서 처음 보는 것과 자기 전에 바라보는 것을 선택하는 삶. 지난 일들에 대한 후회와 현재의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헛발질이 가끔은 제대로 얻어걸려 하나의 득점을 완성할 때가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렸고 그림은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년에도 제주도에서 그림으로 낯선 이들을 반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