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지역은 00 아파트가 대장 아파트지' '그럴 급이 되나? 00동 아파트 매매가 얼마인 줄 알고' '야야, 그 이번에 신축한 아파트 어떨 거 같냐? 입지는 좋던데'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어디를 가던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동 00 아파트가 학군이 좋다', '00 아파트가 초역세권이다', '00 아파트가 재개발 대상지역이다'라는 이야기 숱하게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런 거물(?)들의 싸움에 대해서는 익숙하시겠지만, 고시원도 아파트처럼 등급이 있다는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주변 환경과 재개발과 이슈로 가격이 결정되는 아파트처럼 고시원도 가격이 결정되는 나름의 근거들이 있습니다.
만약 고시원을 가야 한다면 어떤 고시원을 가야 할까요? 어떤 고시원이 좋은 고시원일까요? 정답은 간단합니다.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비쌀수록 좋습니다. 고시원이 아파트와 다른 점은 외부환경보다는 내부시설이 가격에 더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고시원의 등급과 가격을 결정하는 요인들은 아주 다양합니다.
창문
고시원은 햇빛이 드는 외창방과 햇빛이 들지 않는 내창방으로 구분됩니다. 그러면 내창방은 어디로 창이 나있냐고요? 고시원 복도를 향해 뚫려 있습니다. 외부 세상이 보이지 않으니 사실 창문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합니다. 고시원의 가격을 결정하는 가장 1순위 요인은 외창의 유무입니다. 외창 방과 내창방의 가격은 적게는 5만 원, 많게는 10만 원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환기와 채광이 필수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창 방을 선호하지만, 겨울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대부분의 고시원이 주택용 건물이 아닌, 일반 상가건물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단열이 잘 안되거나 외풍이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화장실, 샤워실
요즘 대부분의 고시원이 개인 화장실/샤워실을 옵션으로 제공합니다. 당연히 여럿이서 쓰는 공간보다는 나만이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이 좋겠죠. 다만 기존에 세면시설이 없었던 고시원의 경우 무리하게 방에 세면장을 쑤셔 넣은(?) 경우가 있습니다. 화장실 바닥이 방바닥보다 높이 솟아 있어 샤워가 끝나면 방으로 물이 줄줄 샌다거나, 화장실을 문 없이 유리창으로 대충 막아놓은 곳이 있는데 이럴 경우 온 방이 스팀 사우나가 되어 있곤 합니다. 저의 곰팡이와의 동거도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밥과 김치
고시원이라는 주거의 가장 특이한 점은 밥과 김치를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간혹 라면이나 국, 반찬을 제공하는 프리미엄 5성급 고시원도 존재합니다. 물론 입실료에 다 반영이 되어있겠지만요. 항상 공용 주방에 준비되어있는 따듯한 밥과 김치는 돈이 궁한 거주민들에겐 큰 힘이 되어 줍니다.
세탁시설
비싼 입실료를 자랑하는 일부 고시원은 개인 세탁기를 방에 제공합니다. 그나저나 좁은 방이 더 좁아지는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20명에 가까운 사람들과 하나의 통돌이 세탁기를 이용하다 보면 이런 옵션이 탐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입실료를 듣고 1초 만에 세탁기 방을 포기했습니다. 대부분의 고시원이 세제를 기본으로 제공하는데, 종종 코인 세탁기를 설치하여 이중과세(?)를 실시하는 고시원도 있습니다.
소방시설
제가 고시원 입주를 앞두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입니다. 화재 대피로는 확보되어 있는지, 소화기 유무, 스프링클러 설치 여부, 복도 넓이가 충분하고 방문이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소재인지. 사람이 주거하는 공간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들이지만, 고시원은 준주택, 다중이용시설에 속하기 때문에 주택 수준의 엄격한 안전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본인의 안전을 스스로 확인하고 책임져야 하는 공간이 바로 고시원입니다. 고시원엔 방에서 흡연하는 사람이 많고, 겨울철에 전열기구를 몰래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에 이웃 방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두는 것도 중요합니다.
주변 환경
아파트 입주를 고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주변 환경이 아닐까 싶네요. 상권, 학군, 역세권, (대학) 병(원) 세권, 리버뷰, 오션뷰 등 집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요인이 많죠. 고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격이 너무 저렴하여 찾아갔던 한 고시원은 아래층에 노래방 2개, 옆 건물에는 노래 타워가 우뚝 솟아있더군요. 건물입지를 확인하자마자 방 구경 약속을 헐레벌떡 취소했던 기억이 납니다. 방문할 여력이 없다면 꼭 거리뷰로 확인을 해보시는 것이 좋겠네요. 밤마다 BGM이 깔린 삶을 살고 싶지 않다면요. 고시원은 2종, 3종 일반 주거지역과 준주거지역, 중심 상업지역, 일반 상업지역, 근린 상업지역 등 대부분의 용도지역에서 영업이 가능합니다.
방음시설
대부분의 고시원이 벽이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방음이 잘 되지 않습니다. 층간소음은 물론이고 벽간 소음도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공간.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 없는 옆방 아저씨가 두산 베어스의 팬이라는 사실을 제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6시 반만 되면 옆방에서 야구 중계가 우렁차게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하하하. 이점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벽이 얇고 방과 방 사이의 간격이 좁아 이웃 방과 대부분의 소리를 공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외에 고려할 만한 요인들
개인 냉장고가 있는 편이 좋습니다만, 좁은 방에서 오래된 냉장고가 내지르는 소음은 정말 어마무시합니다. 저는 입주 초기에 냉장고 소음 때문에 냉장고 코드를 뽑아놨었거든요. 지금은 귀가 잘 먹었는지(?) 귀마개 없어도 잘 잡니다만, 귀가 예민한 분들은 많이 힘들 수가 있겠네요. 그리고 주변에 공원이 있으면 정말 좋습니다. 좁은 방에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넓고, 탁 트인 공간을 찾게 됩니다. 공원은 돈도 안 들잖아요. 대학가나 상권이 발달한 곳일수록 저렴한 가격에 끼니를 해결할 수 있지만 생활 소음이 크게 늘어날 수 있습니다. 여성분들의 경우 치안이 걱정되시는 분이 많을텐데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는 사무실을 통해야만 진입이 가능한 고시원이 많으며 감시카메라, 공동 현관 잠금장치 유무를 확인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나의 지갑 사정을 고려해서 갈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찾으면 됩니다. 고시원은 보증금이 없어서 전입전출이 자유롭고, 어느 정도 풀 옵션(?)을 갖추고 있기에 가방 하나만 들고 와도 생활이 가능합니다. 월세만 내면 수도세, 전기세, 가스 이용료, 쓰레기 처리 비용, 인터넷 이용료와 같은 추가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호기롭게 저렴한 고시원을 선택하는 것은 권해드리고 싶지 않네요. 젊어서 고생은 고생도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가 고생길을 제 발로 찾아가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알아서 잘 찾아오는 것이 바로 고생길입니다. 몸과 정신을 회복해야 하는 집이라는 공간을 두고 주사위 던지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양한 고려 요인들이 있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한 두 달 생활하다 보면 이곳의 삶에도 자연스레 적응을 하게 됩니다. 물론 절대로 적응할 수 없는, 고시원이란 환경의 특성상 감내해야 되는 수많은 불편함이 이곳저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파트는 더 좋은 값을 받기 위해 급을 따지지만, 고시원은 최악의 환경을 피하기 위해서 급을 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시원에 입주하는 사람들은 고시원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주거 옵션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고시원의 등급은 잔혹한 주거 현실과 나의 행복 간의 lose-lose 협상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가격 때문에 창문을 포기하는 사람들. 사회 초년생들이 지독한 현실의 벽을 체감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