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을 걸었을까.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여행경비 마련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등록금과 생활비로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에게는 여행 한 번 편하게 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교통비를 쓰지 않기로 했다. 새벽에 제주도로 출발하는 가장 저렴한 비행기를 예매하고 아무 계획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0km가량을 매일 걸었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심지어 훈련소 때 했던 행군조차 즐거웠다(아마 전역을 해서 기억이 상당히 미화된 것 같다). 초, 중, 고 12년을 산 중턱에 있는 학교에 다녀서 그런지 매일매일 지속되는 강행군 속에서도 발에 물집 하나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길을 걸어야 볼 수 있는 것이 훨씬 많지 않은가. 세상에는 발이 아프고 갈증이 느껴져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물론 차량을 렌트할 넉넉한 자금이 있었더라면 내가 그 고생을 했으려나 싶다.
보름이 지나니 돈이 얼마 남지 않았고,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그때까지만 버텨보기로 하였다. 지나고 보니 무슨 고생을 사서 한 것인지. 아무튼 공항을 가기 위해 제주시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밥 먹을 곳을 검색했다. 그런 심리 있지 않은가. 마지막 식사는 제대로 먹어야겠다는. 한국인은 밥이 전부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집들은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막연하게 제주도 일상음식을 먹고 싶었다. 눈에 보이는 슈퍼에 들어가 사장님께 무작정 여쭤봤다.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데 어디가 맛있어요?"
사장님과 아주머님은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을 것이다. 뭐 '00 세제 있어요?'라던지 '00라면 없어요?' 등의 질문을 많이 들으셨겠지만 슈퍼에 와서 김치찌개 집을 찾다니. 사장님은 어이가 없으셨던지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러고는 시장 사람들이 많이 간다는 김치찌개 집을 추천해주셨다. 그리고 가게 앞에 놓인 귤을 한 주먹 챙겨주셨다. 제주도는 어떤 가게를 가도 귤이 없는 곳이 없었다. 덕분에 배를 곯으면서 다니지는 않았다. 고마운 귤.
가게 안에 들어가니, 내가 진정으로 찾던 집으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 방언만이 가득한 식당. 내가 들어가자 가게 손님들의 시선이 다 나에게로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누가 음소거를 누른 줄 알았다. 이곳에 온 여행객은 처음이라는 표정들. 정리되지 않은 머리와 수염, 내 몸만 한 백팩과 침낭. 그냥 꼴이 말이 아니어서 쳐다보신 것 같기도 하다. 그때가 8월쯤이었던 것 같다. 도보 여행하기엔 많이 더웠던 시기.
다행히 1인분 주문이 가능했고 처음으로 나를 맞이한 것은 2L 삼다수 페트병에 담긴 시원한 보리차였다.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서나 볼 수 있던 비주얼. 물은 구수하고 시원했다. 찌개가 나오자마자 숟가락을 들었는데, 주인아주머니께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다. 반찬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후다닥 반찬을 준비하러 가셨다. 아래 사진을 보자.
약 20일가량을 여행하며 처음으로 받아본 고봉밥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집 밥이 생각나서. 국물 한입을 먹자마자 그 눈물이 쏙 들어갔다. 정신없이 밥을 먹고 있으니 아주머니께서 말도 없이 반찬을 리필해주셨다. 김과 간장만 가지고 한 그릇은 거뜬하게 먹을 수 있었고 모든 반찬이 정말 맛있었다. 아주머니는 별말씀도 없이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챙겨주셨다. 지나고 보니 참 감사하다.
가끔 여행을 하다 보면 처음 보는 이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때론 내가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들의 호의에 눈물이 핑 돌기도 하고, 도움을 준 나에게 연신 고맙다며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꺼내시는 분들도 있었다. 도움받은 이들은 도움받은 대로 감사하고, 도움을 준 이들은 상대방의 감사에서 또 감사함을 느낀다.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 따듯한 양심이 살아있다는 것을 여행을 하다 보면 느끼곤 한다.
올레길 입구를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나에게 길을 알려주시던 할머니, 물 하나 사러들어갔다가 손주들이 생각난다며 귤을 한 봉지 가득 담아주시던 전방 할아버지 할머니,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다며 우산을 챙겨주시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오늘 게스트하우스를 찾은 유일한 손님이라며 일인실로 업그레이드해준 인심 좋은 아저씨까지 짧은 여행기간 동안 참 많은 배려와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드릴 것이 없는 가난한 여행자였던 나는 환하게 웃어드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아마 그들도 다른 이들에게 받은 사랑과 관심을 나에게 온전히 전달해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 세상엔 시간이 지나도, 세대가 바뀌어도 식지 않고 이어지는 따듯한 사랑이 있는 것 같다. 전달받은 이 따끈한 사랑과 관심을 나도 오롯이 다른 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 같다.
일상에서 지치고 다친 삶을 위로받을 수 있는 곳.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 받은 일들이 모르는 이들로 인하여 회복되는 공간들이 있다. 이 모든 사랑을 가르쳐준 이름 모를 인생의 선배님들을 생각하며 이 따듯한 마음을 잊지 않고 나눌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