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비상 방송
어디선가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일까?
'화....발.... 대....속하....'
이어지는 요란한 타종소리, 익숙한 소리였다.
‘띠..리링..띠...리....띠리리리리리링!’
무언가 이상했다.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대피로를 따라....’
눈이 번쩍 떠졌다. 위, 아래옷을 손에 잡히는 대로 주워 입고 맨발을 운동화에 쑤셔 넣은 채 계단을 향해 달렸다.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다시 올라오고 문 앞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람들. 1층에서 만난 잠옷 바람의 이웃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고시원 건물을 올려다보며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었. 5분 남짓 울리던 화재 방송이 꺼졌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기계 오작동이거나 누가 방에서 담배를 피웠거나. 전자든 후자든 똑같이 나빴다.
첫 만남, 첫사랑. 첫 화재 비상 방송.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평화로웠던 어느 날, 샤워를 하기 위해서 웃통을 벗는 순간 화재 방송이 울리기 시작했다. 5분만 부지런했어도 수건 한 장만 두르고 뛰어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곧장 기계 오작동이라는 단체 문자가 도착했다. 저녁에 방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문자가 하나 더 온 것을 보니 기계 오작동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에도 일단 뛰고 봐야 할 것 같다.
두 번, 세 번. 네 번...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수차례 발생했다. 방송 소리에 쏜살같이 뛰어나가던 나에게도 어떤 변화가 생겼다. 어느 순간 ‘나갈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정신 안 차리냐?’ 곧바로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방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층 현관문을 통과한 모범생은 5명이었다. 다행히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다.
재난문자 발송이 막 활성화되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내용을 꼼꼼하게 읽었었다. 그런데 ‘이게 재난 상황이야?’싶은 정보들이 재난 문자라는 이름으로 하루에 수차례 찾아오기 시작하자 이에 알림을 차단하거나 대충 읽고 넘겨 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재난 경보가 더 이상 재난 경보가 아니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무한반복 재(再)난문자로 느껴질 정도니...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면 고시원 거주민들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는 화재 방송이 울릴 때, 4층 계단 입구에 멈춰 고시원 복도를 돌아보았던 적이 있다. 그 누구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굳게 닫힌 문들과 시끄럽게 울리는 화재 방송. 몹시 시끄러웠던 그 공간이 역설적이게도 몹시 적막하다고 느껴졌다. ‘또 오작동이겠지?’ 고시원 화재 비상 방송은 이곳 사람들에게 안전 불감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해군에서 복무할 당시 밤마다 꼭 하는 훈련이 있었다. ‘소화방수’라는 훈련이었는데 저녁 시간에 갑자기 이런 방송이 함 내에 울려 퍼졌다. ‘훈련! 승조원 식당 A급 화재 발생! 훈련!’ 영내 승조원은 주어진 역할에 따라 이곳저곳 정신없이 뛰어다니곤 했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미리 숙지하고 있었고 정기적인 훈련을 통해 대처 방법과 협력하는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다. 안전 수칙을 만들고 시설을 정비하고 소방인력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화재 현장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도 아주 중요하다.
다양한 법 개정과 새로운 규제를 통해 고시원은 이전과 비교했을 때 훌륭한 소방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민감도 높은 감지 시스템, 방문마다 붙여져 있는 대피로 안내판, 형광 + 조명 유도선까지. 하드웨어는 갖췄으니 이제 소프트웨어를 정비할 시기가 아닐까. 원인 불명의 작은 연기에 반응했던 화재 방송이 우리 일상에 꼭 필요한 어떤 훈련이 되어줄 수 있다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고시원은 주거지역이 아닌 상업 지구에 위치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불법 주정차의 비중이 높으며 소방 도로가 제대로 확보되어 있지 못한 곳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상업 지구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새가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건축이 되어있어 화재가 주변 건물로 퍼질 위험도 아주 높다. 또한 상가 건물 비상계단은 종종 사업장의 성격에 따라 폐쇄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인터넷,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은 국내 인프라를 고려하여 고시원 거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소방 교육이 주기적으로 실시된다면 보다 안전한 대피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 황제는 소방 도로와 화재 대피로, 새로운 수로를 도입했다고 한다. 건축자재로 가연성 소재를 쓰는 것을 막기도 했고. 1666년 런던 대화재는 런던 전체 면적의 80%가량을 태워버리고 말았다. 5일 동안 꺼지지 않은 불에 7만 명이 집을 잃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소방조직, 화재 보험, 석재 건축법과 소방 관련법들이 제정되기 시작한다. 64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와 1666년에 발생한 런던 대화재. 우리보다 먼저 문제를 경험하고 이를 극복한 사례를 보며 충분히 예견하고 예방할 수 있었던 일들이 계속하여 반복되고 있다.
이른 새벽 고시원 1층에서 잠옷바람으로 만난 이웃들. 다시 잠들기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거주자들을 괴롭히던 화재 비상방송이 며칠을 계속해서 울렸고, 기계 오작동이며 수리를 하겠다는 짧은 안내방송이 스피커를 통해 전해졌다. 그리고 며칠 뒤, 화재 비상방송은 다시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고시원 사람들이 '준'주택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준'인권, '준'기본권, '준'행복권을 누려야 할 당위적 근거는 단 하나도 없다. 소를 잃어봤으면 이제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사람을 잃어봤다면 이제 주거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미덕을 배워야 하는 때늦은 조언마저 절실한 시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