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공유 주방 이야기
쉼 없이 돌아가는 전자레인지 앞에 줄지어 놓여있는 3분 카레, 핫바, 컵라면. 그 뒤에 저녁밥을 올려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한 10분 정도는 기다려야 내 차례가 올 것이다. ‘띵!’ ‘띵!’ 조리 완료를 알리는 알림음이 방문 건너에서 들려왔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고 부에 가니 새로운 컵라면, 도시락이 줄을 서있다. 전자레인지 문을 여니 다양한 음식 냄새가 ‘확’ 밀려온다. 공용 냉장고를 여니 김치 냄새가 ‘훅’ 올라온다. 누가 김치통 뚜껑을 열어 넣고 급하게 내뺀 모양이었다. ‘띵!’ 드디어 저녁밥 완성! 목장갑으로 밥그릇을 감싸 쥐고 헐레벌떡 방으로 돌아와서 밥을 먹으려는 찰나.... ‘웅-’ 폰이 울렸다. '<긴급 공지> 보일러 고장으로 내일까지 싱크대 사용 금지.' 오늘 설거지는 어떻게 한담? 그런데 머리는 왜 이렇게 아플까?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고시원 주방. 2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 층에 모여 사는 고시원은 ‘ㄷ’ 자 형태로 되어있는데, 두 개의 복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바로 주방이자 세탁실이었다. 싱크대 하나, 하이라이트 2구, 전자레인지 1개, 세탁기 1개. 이름 그대로 정말 냉장만 가능한 냉장고 1개(냉동실은 식품 회전율이 낮아서 많은 고시원이 따로 제공하지 않는다). 사람이 몰려드는 식사 시간은 마치 전투적으로 코스 요리를 만드는 레스토랑 주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요란스레 설거지를 하며 음식물 분쇄기를 가동하는 할머니, 느긋하게 시금치 된장국을 끓이는 아저씨,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담는 아주머니. 공용 컵으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물로 대충 헹궈 건조대에 올려 넣는 관리인과 이를 마뜩잖은 눈빛으로 쳐다보는 젊은 여학생까지.
고시원 주방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코로나 팬데믹 이전 하나의 빅 트렌드였던 ‘공유경제’가 떠오른다. 당시에는 기존 산업이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 혁신적인 사업 아이템이 쉼 없이 쏟아져 나왔었다. 전염병이라는 비가시적인 위협이 팬데믹으로 진화하여 전 지구를 덮치자 ‘공유’라는 말은 기억 너머로 사라지고 프라이버시 공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고시원 사람들은 변화하는 트렌드에 관계없이 입주 이래로 ‘공유경제’라는 키워드에서 벗어났던 기억이 없을 것이다. 시대를 매우 일찍이 앞서감과 동시에, 시류에 편승하길 거부하는 뚝심 있는 지조까지 겸비한 공간이 아닐까?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주방에 가거나 빨래할 때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녀야 한다. 이곳은 나의 집이면서 우리의 집이기도 했다.
규칙 없이 방치된 주인 없는 목초지는 언제나 가장 먼저 황폐해진다. 많은 이용자가 집중되는 공간집약적인 공유지는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며 이는 고시원 주방을 한 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후드에는 누런 기름이 떨어지고, 냉장고는 찾아가지 않는 음식으로 가득하고, 수건 한 장을 두 시간째 빨고 있는 세탁기를 보고 있자면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이런 불상사를 예방하고자(효과는 거의 없지만) 고시원 벽 이곳저곳에 수많은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다. TV에서 본 간판으로 가득한 홍콩의 번화가가 떠오른다. '00 하지 마세요!' '00철저히 하세요!' '제발 깨끗하게 좀 사용합시다!' '00 사용을 금지합니다.' 이웃 간의 대화가 사라진 팬데믹 속 고시원의 삶은 느낌표가 질러대는 무언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온라인 공간은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이용할수록 유용한 데이터와 아이디어가 형성되지만, 고시원 공용시설은 사람의 손을 많이 탈수록 조금씩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고시원은 정상 주택이라면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생활 시설이 공공재로 존재한다. 선사시대의 움집에도 한 가족을 위한 화덕이 있었던 것 같은데.... 미하일 불가코프의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선 임시 가벽으로 쪼개진 주택에서 살아가는 모스크바 주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국영주택 대기 기한이 끝도 없이 연장되는 모스크바의 겨울. 작가는 이웃들이 말 한마디, 이유 없이 사라져도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 너무나 가까이 붙어있는 나머지 서로의 삶에서 시선을 돌리려고 애쓰는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소설에 담았다. 옆집 사람이 언제 이사를 왔고 앞집 사람이 언제 떠났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나의 집, 고시원이 떠올랐다.
같은 장소에서 함께 밥을 하고 빨래를 하지만 말 한마디, 마음 한 점 쉽게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 주방을 가기 위해, 세탁물을 가지러 갈 때 마스크를 써야 하는 '주거' 공간. 적절한 개인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 고시원에서는 서로가 침묵을 통해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고자 노력한다. 고시원은 물리적인 벽보다 마음의 벽이 더 두꺼운 공간이었다. 광장도 밀실도 아닌, 그렇다고 중립지역도 아닌 묘한 성질을 가진 공동생활 시설.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낯익은 얼굴들이 아무런 대화 없이 줄줄이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