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record

평범한 하루를 기록하는 이유

by R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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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에 살면서 기록하는 일기를 바탕으로, 저(=백수)의 하루 일상을 재구성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하루가 지루하기 짝이 없기에 3~4일간의 기록을 적절히 섞어 새로운 하루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아침 5시 30분

옆 방 아저씨 티브이 소리에 눈을 뜬다, 괴로운 신음소리가 내 입가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나는 알람을 설정하지 않아도 이 시간에 매일 일어날 수 있다. 옆 방 아저씨 덕분에. 허리가 아프다. 창문을 열고 창문에 침낭을 걸어 말린다. 고시원 앞의 거대한 빌딩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침 6시 30분

옆 방 여자 방에서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나는 이 시간에 글을 쓰거나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첨삭 작업을 한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울리는 알람. 학생 아니면 수험생이지 싶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어 고요한 고시원 복도를 지나 공용 주방에 들어가 차를 한 잔 우려 마신다. 정신이 조금씩 돌아온다. 고시원 복도는 창문이 없어 24시간 내내 어두운 주황색 조명이 켜져 있다. 오늘은 날씨가 좋을 것 같다. 빨래를 해야겠다.


아침 8시

머리를 식히러 고시원 근처 산책로로 나간다. 정장을 입은 사람과 회사 카드 목걸이를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사람들. 산책로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러닝과 사이클을 즐기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휘적휘적 산책로를 걸어 다닌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 백수 같다. 고시원으로 돌아오니 고시원을 관리하시는 분이 복도를 청소하고 있다. 관리인분에게는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햇빛이 들지 않는 복도는 항상 어두워서 깨끗한 지도, 더러운지도 잘 모르겠다. 청소를 안 한다면 이곳이 더욱 어두워지려나?


아침 9시

하는 것도 없지만 아침밥은 꼭 챙겨 먹는다. 식빵 한 봉지를 사서 땅콩버터를 발라먹거나, 산책길에 자주 들리는 떡집에서 3,000원짜리 찹쌀떡을 사 온다. 그리고 글을 쓴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노트북은 오늘도 켜지는 데 하루가 걸린다. 인스턴트커피를 하나 뜨거운 물에 녹여 후후 불어 마신다. 도서관에 가기 위해 3,000원짜리 스테인리스 컵과 배고플 때 먹을 간단한 간식을 챙긴다. 고시원 백수가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공간은 도서관과 공원뿐이다.


오후 12시

아침과 마찬가지로 한 일이 없지만 점심을 먹는다. 컵라면이나 봉지라면, 고시원 밥과 김치, 냉장고에 구비된 양념과 반찬들로 한 끼를 간단히 때운다. 마트에 저렴한 야채가 있으면 꼭 사서 미리 손질해두는 편이다. 양배추를 한통 사서 라면을 끓일 때 넣거나 쌈으로 싸서 먹는다. 고구마와 감자는 랩을 씌워 전자레인지에 쪄 먹는다. 이곳에 살면서 초식동물이 되어가고 있다.


오후 3시

고시원 침대 위에서 책을 읽거나, 서점에 가서 최근에 나온 책을 찾아 읽는다. 요즘 책들은 트렌드가 명확한 것 같다. '~재테크 요령'. '~하는 비법'. '세상에 왕도(王道)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가끔 공원을 찾아 명상을 즐긴다. 하늘이 아닌 바닥을 활보하는 비둘기들. 연못과 하천변에 가득한 물고기 떼. 그리고 오리와 이름 모를 새들. 오늘 갔던 공원에는 토끼가 있었다. 맙소사. 야생 토끼가 도심 한복판에 있다니. 누가 유기한 토끼일까? 3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오후 5시

요샌 저녁밥이 그다지 생각나지 않는다. 글을 쓰고, 필요한 자료를 찾고, 자료를 출력하고, 읽고 읽고 또 읽는다. 눈이 아프다. 고시원에 입주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안구 건조증이 생긴 것 같다. 고시원 주변엔 모텔과 유흥업소가 많아 밤이 되면 조금 시끄러워진다. 고함을 내지르는 사람들. 클락션 소리.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소리.


오후 7시

과자 몇 개를 주워 먹고, 재난 지원금과 선물 받은 기프티콘을 털어 조용한 카페를 찾는다. 마감시간까지 책을 읽고, 컨설팅 작업을 하고, 새로운 글을 쓴다. 다음 달부터 소설을 쓰기로 다짐했다. 첫 삽을 뜨는 것이 쉽지가 않다.


오후 9시

넷플릭스를 틀어 평소에 궁금했던, 아니 이런 주제가 있는지도 몰랐던 영상을 찾아서 본다. 세상엔 참 신기하고 재밌는 일들이 많은 것 같다. 다큐멘터리, 드라마, 오래된 영화들. 폐인이 되기 완벽한 환경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서의 여행을 선택한 것 같다. 낯선 여행지에서 맡을 수 있던 이국적인 공기의 향이 그리워진다.


오후 11시

자야 한다. 오늘 무언가 많이 한 것 같지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월세 날이 다가온다. 다음 달엔 어디로 가야 할까? 잠이 오지 않는다. 이 생각과 함께 잠에 빠져든다.


오후 11시 30분

옆방 아저씨의 티브이 소리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혼자 구시렁거리며 귀마개를 찾아 귀에 꼽는다. 도를 닦는 기분이다. 스님도 조용한 산골에서 도를 닦을 텐데. 이게 뭐람.


기록의 이유


기록. 일상을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전에 찍은 사진과 동영상, 주고받은 편지들, 어린 시절 키를 재던 모퉁이 벽까지.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있던 과거의 추억들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기록물에 의해 다시 생생히 살아나곤 합니다. 기록을 살펴보다 보면 우리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됩니다.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외형적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면, 남아 있는 글을 통해선 정신적인 성숙과 변화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열정적이고 능동적이며 힘이 넘치는 과거의 문장들. 짧은 몇 년 사이에 저도 참 많은 부분이 변했고, 어떤 부분은 참 많이 무디어졌다는 것을 지난 기록들을 살펴보며 깨닫곤 합니다. 차곡차곡 쌓인 기록은 미흡한 부분을 파악하고 보완하게 해주는 훌륭한 가이드라인이 되어줍니다. 나의 기록만큼 훌륭한 교훈을 주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바로 역사. 그리고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들의 피와 땀이 서린 노고.



출처 : 문화재청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참 재미있는 기록들이 많습니다. 널리 알려진 일화로, 말을 타다 낙마를 한 태종이 사관에게 이를 알리지 말라고 한 내용까지 실록에 기록이 되어 있죠. 태종은 자신을 집요하게 스토킹(?) 하던 사관을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기까지 합니다. 세종은 실록을 읽어보려 했으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세조 즉위 이후로 실록을 볼 수 없는 후대 왕들을 위해 선대왕의 업적을 수록한 [국조보감]이 편찬되기 시작합니다. 실록에선 우리 민족의 글자인 한글에 대한 세종대왕의 철학과 신념을 엿볼 수 있으며, 어느 지역에서 강아지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다소 뜬금없는 기록까지 실려 있습니다. 초신성 폭발과 천문 관측 자료, 지진 기록같이 현대 과학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472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실제 역사를 기록한다', 그리고 '평가는 보는 사람의 일'이라는 철학과, 왕이 실록을 열람할 수 없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킨 객관적이고 역사학적으로 의미가 큰 조선시대의 걸작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지구촌 인류 역사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사마천


전한 시대에 태어난 사마천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역사서 편찬을 일생일대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적에게 투항한 장군을 옹호하다 한무제의 미움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고 맙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삶의 목적으로 삼은 [태사공서]를 완성하기 위해 치욕스러운 형벌인 궁형을 감수하였고, 옥중에서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과 모욕에 굴하지 않은 사마천은 이천 년을 이어온, 중국 역사서를 대표하는 걸작인 [사기]를 남기게 됩니다. [사기]는 역사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사마천의 뛰어난 문학성과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명문장들로 가득 찬 최고의 역사서이며, 세상의 이치를 배울 수 있는 시대를 초월한 교양서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국가,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는 이 땅에 존재할, 자신들의 언어를 이어받을 후손들을 위해 선조들이 남긴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과 과. 그들의 화려한 업적과 치명적인 실수가 낱낱이 적힌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얻고, 시대마다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탐욕이 낳은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귀양과 치욕스러운 형벌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초를 작성한 사관과 사기를 지은 사마천. 후대를 위해 결코 사라지면 안 되는 교훈과 가치를 글자로 남긴 그들은, 기록 위에서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공개되는 온라인 공간에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를 한 번 더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일기장과 달리 브런치에 쓰는 글은 몇 번의 필터를 거치게 됩니다. 더 좋은 표현을 고민하게 되고, 나의 생각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며, 보다 긍정적인 시점에서 하루를 다시 보려고 합니다. 저에겐 이 고시원에서의 기록이 하루의 성찰이자, 지난 과거의 반성이며, 앞으로 나아갈 미래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고시원에서의 일상을 인터넷에 올린다고 하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지인이 있었습니다. '뭐하러 그런 걸 올려, 쪽팔리게...' 맞는 이야기입니다. 고생 고생을 하여 들어간 직장에서 적응하지 못했고, 20대 후반에 다가서는 나이에 고시원에 살며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 어느 정도 쪽팔리고 부끄러운 일이 맞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제 인생 최고의 흑역사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이 모든 기록이 저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미래의 제가 새로운 답과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남기는 이 기록들이 마냥 치부로 남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후회와 실패만큼 저에게 커다란 배움을 주었던 것은 없었습니다. 얕고 단기적인, 당장에 보기 좋았던 얕은 성공들과 함께 쌓인 교만과 자만으로 제가 이곳까지 무너져 내릴 수 있었거든요. 이 커다란 실패의 기록이 내 삶이 새롭게 성장하고 싹트는,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고시원에 사는 것이 부끄럽냐고요? 네,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주소를 적어야 할 때 고시원이라 적는 것이 싫어 건물번호와 호수만 적기도 했고, 어디에 사느냐는 질문에 자취를 한다고 얼머부린 적도 있습니다. 외적인 지표들로 사람을 평가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저도 주거 빈곤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획일화된 평가지표를 제시하는 공동체 속에 살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사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21세기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사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크기가 조금씩 다른 부끄러움을 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이며 우리는 이를 어떤 방향으로 극복하고 해소할 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 세상을 살며 많은 일들에 부끄러워 보았고, 이런 순간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새로운 통찰력을 얻기 위한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앞으로도 항상 노력할 것이며, 이런 태도는 저의 발걸음이 똑같은 곳을 배회하거나, 똑같은 실패의 기억 위에서 포류 하지 않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글자와 기록의 힘. 나의 평범한 하루가 이 글자 위에 남아 나만의 [실록], 나만의 [사기]의 한 편을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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