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을 떠나며

good bye, gosiwon

by RNJ
고시원을 떠나며


잔화(殘花)


박스 3개, 캐리어 1개, 백팩 1개. 이사 준비가 끝났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사계절을 고시원에서 보냈다. 자연스레 물건이 하나둘씩 늘었고 이삿짐을 싸다 보니 3박스나 되는 새로운 물건이 생겼다. 잡동사니가 언제 이렇게 많이 쌓였는지.... 짐을 싸기 전에는 미처 몰랐고 박스의 반은 책이었다. 절약을 목 놓아라 부르짖었건만! 지나고 보니 나에게 미니멀리즘은 12월 31일에 세우는 새해 운동 계획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이 그러하였듯이, 나 또한 입주와 동시에 탈주라는 목표를 세웠다. 목적을 달성했다면 스스로에게 대견한 마음이 들어야 할 텐데, 길고 지루했던 악몽에서 간신히 깨어났다는 묘한 기분만 남았다. 이삿짐을 모두 택배로 보내고, 텅 빈 고시원을 사진에 담았다. 이 골방에 정이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좁고 시끄럽고 불편한 이 공간이 쉽게 그리워지진 않겠지만, 이 방 속에서 무언가 해내고자 했던, 조금 더 젊고 용기 있던 모습은 조금 그리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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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이 방에 새롭게 이사 올, 얼굴을 마주할 일 없는 입주자를 위해 작지만 도움이 될 것 같은 물건을 남겨놓기로 했다. 롤휴지, 빨래 바구니, 옷걸이, 라면, 일회용 수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이사를 나가는 사람이 집에 빗자루를 하나씩 남겨놓고 떠나곤 했었다. 당연히 청소도 끝마치고. 다음에 이사 올 사람들이 입주 청소를 할 때 사용하라는 작은 배려였다. 가방 한 개 들고 이사 오는 고시원 사람들은 이런 소소한 물건들의 부재에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다. 누군가 벽에 붙여놓은 거울과 후크,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옷걸이와 방문에 붙여있던 마그넷과 올해 달력. 고시원에는 이전에 살다 간 사람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나도 무언가 남기고 떠나고 싶었다. 나를 위해서는 청소가 끝난 방 사진을 하나 찍었고, 다음 사랑을 위해서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은 소모품과 생필품을 남겼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고시원 침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기록을 다시 다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원시원하고 명확한 답을 찾진 못한 것 같다. 기분이 좋지도, 마냥 나쁘지만도 않았다. 길고 길었던 고시원 라이프. 뜯어낸 기억의 포장지를 다시 덮으니, 이제야 고시원 라이프가 완전히 끝난 것 같다. 마지막까지 ‘나의 집’이라 부르지 못했지만, 나의 20대 추억의 일부가 잠들어있을 애증의 공간.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끌고, 다시 돌아올 따듯한 봄날을 향해 첫걸음을 떼어 본다.



그림 제공 : 친구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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