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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거리, 오래된 예술가의 길

by R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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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부끄러운 자본주의적인 질문일까요. 이중섭처럼 고독한 길을 걸어온 이들 앞에서 '예술과 창작은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라는 말은 통속적이고 나이브한 비평으로 느껴집니다.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세상을 살며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일지 쉬이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그림을 빤히 바라봅니다. 다음 주엔 학생들을 데리고 이중섭 미술관과 그의 생가에 와야 합니다. 이중섭. 그의 작품을, 그리고 이 거리를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요?


사후에 인정받은 비운의 예술가. 가족들을 놓쳐버린 기러기 아빠. 고독사한 은박지 화가. 그를 설명하고자 할 땐 언제나 슬픈 단어들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와 닐스 헨리크 아벨이 나란히 생각납니다. 시대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슬픈 삶이었을 것이라는 단편적인 추측은 편리합니다만, 마음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래도 (종종) 즐거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라는 결론도 위안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다시 한번 그의 그림을 살펴봅니다.


전쟁과 피난, 가족과의 이별, 정신병원, 죽음.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바람에 오히려 감상은 어려웠습니다. 예술가의 길과 작품은 연결되어 있으나, 이중섭과 그의 그림은 작가가 다른 별개의 창조물입니다.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빗는다고 인간이 신이 되지 않듯이, 작품은 반-분신, 반-돌연변이인 기묘한 존재입니다. 창작을 할 때 모든 근육이 불수의근처럼 움직이는 듯한 체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사유는 결과물로 곧장 이어집니다. 그 중간 과정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둘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작품은 예술가와 관람자 모두에게서 멀리 떨어진 채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감상하기 위해선 모두의 위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린 미술관의 침묵, 작은 글씨로 촘촘히 적인 끝없는 설명, 제한된 조명아래 압도당합니다. 고요한 미술관에서는 누구나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잠시지만 스스로에게서 멀어진 기분이 들죠. 눈구멍만 뚫린 가면을 쓰자 감상이 불현듯 찾아옵니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예술가 이중섭을 만납니다. 작품을 중심으로 모두가 동일 선상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예술가이자 관람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창조자이자 피조물입니다.


학생들이 바닥에 붙어있는 안내 화살표를 따라 전시장을 빙글빙글 돕니다. 오래된 왕릉에 들어온 기분입니다. 그의 화풍을 보고 있으면 오래되어 색이 바랜 고대의 벽화가 생각납니다. 유물은 망자와 생자를 연결합니다. 우리는 짐작하고, 흘겨보고, 이곳을 떠납니다.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한 뼘짜리 생가를 둘러보고, 쇼핑을 하기 위해 서귀포 올레시장으로 떠납니다. 기념품 가게 사장님은 코로나 때문에 학생들이 오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쉽니다. 다시 이중섭의 생활고를 떠올려봅니다. 저의 통장 잔고도 같이 떠오르네요. 감상은 끝났습니다.


오래된 예술가의 길 위에서 어떤 설명도 유창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젊은 예술가의 배는 조국을 떠나 가족의 품에 닿기를 기원했습니다. 시선과 걸음의 방향이 일치할 수 없었던, 괴로웠던 예술가의 삶을 떠올리자 목이 메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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