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숲은 여행을 하다가 불화가 일어나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한라산을 오르는 커플들의 표정은 어둡습니다. 남자(=대체로 주동자)는 진땀을 흘리며 여인의 눈치를 살핍니다. 꼬맹이들은 나무 계단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웁니다. 어르고 달래 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이쁜 바다 가자니까! 월정리! 표선 놔두고!" "감성 카페 안 가고! 왜 여길 온 거야!" "카트! 동물원! 핫도그!"
강 건너 불구경이라 생각했는데, 강 건너 불은 불도 아니었습니다. 제 뒤에는 수십~수백 명의 '사춘기' 학생들이 서있었거든요. '숲'을 간다는 말에 저를 노려보는 60개의 눈동자를 직면했을 때, 굶주린 하이에나 떼를 만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가 계획한 여행(단 1%의 지분도 없건만!)이 아니라는 말은 성난 고객님의 성에 차지 않습니다. 이럴 땐 말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내뱉어야 합니다.
산과 논으로 둘러싸인 내륙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정말, 몹시도, 보기 애처울 정도로 간절하게 제주도의 푸른 바다를 원합니다. 아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수학여행은 자유로운 체험도, 트렌디한 여행도 아닐 때가 많습니다. 교육이라는 목적 아래 가야 하고, 보아야 하고, 느껴야 하는 것이 지정됩니다. 수학여행은 상투적인 여행이며 탑-다운 방식을 지향하기에 아이들의 염원은 텅 빈 외침으로 끝날 때가 참 많았습니다.
가이드, 고객센터, 숲 해설자 역할을 모두 담당하는 안전 지도사. 이 순간만큼은 같은 처지(=선택권이 없는)의 '여행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숲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조금 먼 곳에서 풀어냅니다. 곶자왈의 유래, 숲이 생성된 시기와 식생 정보는 인터넷에 흘러넘치도록 많습니다. 인생 경험이 갑절은 많은 지도사가 어린 학생들에게 여행지의 대화를 시도합니다.
"쌤은 3년 전에 캐리어 하나 끌고 제주로 이사 왔거든? 배낭에 침낭 하나 넣고 하루종일 걸어 다녔는데..."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처음 보는 남자의 이야기. 흔히 볼 수 없는 몰골을 한 아저씨가 하는 이야기에 학생들이 관심을 보입니다. 저 또한 학교 선생님의 '수업'보다는 '이야기'에 더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한 계단 높은 교탁 위에서 내려오던 대화가 숲 속에서는 eye level에서, 같은 방향을 향해 걸으면서 이루어집니다. 학생들의 머릿속에 호기심이 바글바글 끓어오르자 질문과 이야기가 쏟아집니다. 숲과 길은 하나의 재료입니다.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 흘러가는 실없는 이야기를 모두 길 위에 풀어놓습니다. 그렇게 한 편의 단막-여행이 완성됩니다.
"쌤! 그러면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우리 길을 안내하고 있는 거네요? 우리 큰일 난 거 아니죠?"
여행보다 위대한 상담소는 없습니다. 다시 만나기 힘든 사람과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함께 보내는 것. 여행은 내가 하지 못하고 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줍니다. 일상을 함께 하는 사람과는 할 수 없는 대화가 있습니다. 반면에 서로가 짐을 던지기에 바빠 모두가 홀가분한 길이 있습니다. 익숙한 멜로디가 이끌었던 무의식적인 패턴으로부터의 해리, 자유가 느껴집니다.
종종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고민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제야 이곳, 숲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곶자왈은 식은 화마 속에 자라난 경이의 숲입니다. 거친 바위를 가르며 자라난 뿌리에선 힘이 느껴지며, 식어버린 검붉은 흙에서는 애틋한 열정이 느껴집니다. 무너진 숨골에선 수증기가 올라옵니다. 우린 함께 걸어가는 이들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자연 속에서 나의 위치를 다시 한번 가늠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슷한 모습의 숲길은 무엇이든 발견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합니다. 현문에 우답을 돌려줍니다.
도시를 지배하던 인간은 숲에서 압도감을 체험합니다. 텅 빈 숲길을 걸으며 우리는 목이 아니라, 숨에 말랐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분과 초. 그 사이에서 아등바등 살아오는 우리는 숲 속에서 제 멋대로 늘어난 시간의 편린을 발견합니다. 저 멀리 출발 지점이 다시 보입니다. 그 짧은 시간, 무언가 달라진 학생들이 보입니다. 변화를 목격하는 관찰자의 즐거움이 마음속에서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