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가까이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저도 처음 보네요. 한동안 코로나 세상이었으니. 아이들은 어딜 가든 신날 겁니다."
삼삼오오 모여 깜찍한 사진을 찍고, 억새밭을 향해 뛰어가는 남고 학생들. 남중, 남고, 군대를 나온 저는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내놈들이 어쩜 이렇게 발랄할 수 있을까! "까르르" 기묘한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를 향해 이리 오라 손짓합니다. 걸걸한 중저음의 하모니로.
"형님~ 사진 같이 찍어요"
웃으며 고개를 가로로 젓자 아이들이 몰려와 제 옆에 이열 횡대를 만듭니다. 권유가 아니라 통보였습니다. 찰칵.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거지?
"형! 충성! 감사합니다!"
상큼 발랄한 남고생. 도대체 어는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모르겠네요. 방금 찍은 사진을 보며 소녀같이 웃고 떠드는 남고 학생들. 등골이 서늘합니다. 세상이 언제 어떻게 바뀐 걸까요?
한라산
원격 수업이 실시되고, 체육관은 거대한 자물쇠로 잠겼습니다. 아이들은 소파에서 유튜브를 보고, 컴퓨터 앞에서 축구 유니폼을 입은 채 친구들과 그룹콜을 하며 스포츠 경기를 봅니다. 스크린 속 외국 관중들은 모두 마스크를 벗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익숙했던 풍경이 조금씩 낯설어집니다.
"아이들이 요 몇 년 아무 데도 가지를 못했어요. 체험학습, 수학여행, 캠프, 수련회..."
"어딜 가든 신날 수밖에 없겠네요."
"맞아요. 이렇게라도 나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죠."
백신이 접종되고 방역수칙이 완화되자, 감염의 공포와 힐난의 두려움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텅 비어있던 새별오름 주차장은 관광버스와 렌터카로 가득 찼습니다. 멋지게 차려입은 여행객들이 구두를 꺾어 신고 오름을 오릅니다. 새별오름은 무성하게 자란 억새 덕분에 살이 통통하게 올랐습니다. 경사로에 진입하자 아이들의 입이 떡 벌어집니다. 새별오름 산책로는 정상을 향해 직진하는 고속도로에 가깝습니다.
점심을 먹자마자 축구를 하러 뛰어나가는 남고 학생들은 잠시 주저하다가 곧장 성큼성큼 오름을 오릅니다. 교가를 부르고 만화 주제곡을 부릅니다. 그야말로 광기입니다. 야외활동과 여행에 목말랐던 아이들의 눈빛에서 정복욕이 느껴집니다. 선생님들이 혀를 내두릅니다. 관광객들은 웃음을 터뜨립니다. 꼬맹이들은 신기한 눈빛으로 학생들을 쳐다봅니다. 정상에 오르자 푸른 제주 바다와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이들의 입에서 외마디 감탄사가 흘러나옵니다. 마스크는 축축하게 젖어있습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포즈를 취하고, 가족들에게 전화(아빠! 오름 올라왔어. 무슨 오름? 글쎄?)를 겁니다. 1~2분 정도 감탄하다 오름 아래 푸드트럭을 향해 구르듯이 내려갑니다. 흑돼지 꼬치와 한라봉 주스를 들고 저에게 이리 오라 손짓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대기줄. 푸드트럭 사장님의 입이 귀에 걸렸습니다.
"지도사 쌤, 존나 맛있어요. 한입 하세요!"
담임 선생님의 한숨, 그리고 이어지는
"이쁜 말 써 이것들아!"
선생님의 손에는 귤 한 봉지가 들려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목청을 높이며 이리 오라 손짓합니다. 마스크 아래 미소를 가득 품은 채. 우리는 새로운 시대이자 이전의 삶으로, 나아감과 동시에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희망을 품으며 미소를 되찾고. 코로나 시대가 끝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