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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 빚 갚는 아이들

by RNJ


성산일출봉

성산일출봉 중턱. 몇몇 학생들이 숨을 가쁘게 몰아쉽니다. 선두그룹이 정상에 도착했다는 무전이 들려옵니다. "후미 2번 쉼터입니다. 15분 정도 걸릴 것 같네요." 한숨을 쉬며 무전에 답합니다. 다음 스케줄까지 여유시간을 대강 계산해 봅니다. 아이들을 재촉해서 빠르게 정상에 올라야 할지, 되돌아서 내려가야 할지.


학생들을 인솔하다 보면 방문하기 꺼려지는 여행지가 생깁니다. 그중에 한 곳이 바로 성산일출봉. 버스가 성산리에 진입하자 나이롱환자들의 곡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선생님 아파요!"

"어디가 아픈데요?"


마음, 국제 정세, 손톱, 뒷골 등등. 학생들은 어디에 '오른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반응합니다. 아기새로 가득 찬 거대한 새둥지를 보는 기분입니다. '풍경이 좋다, 제주 10대 절경이다' 같은 말이 통할 나이가 아닙니다. 지금은 당근보다 채찍, 팩트 폭격이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비행기 값 본전 뽑아야지. 요새 국제 유가가 얼마나 올랐는데. 얼른 일어나요. 매주 일출봉 올라가는 내가 더 마음이 아프지. 그리고... 너희 내년부터 학교에서 꼼짝도 못 할 텐데...?"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섭니다. 고등학교 2학년. 수능 전 마지막 여행. 이 귀중한 시간을 창문도 없는 버스 안에서 보내고 싶어 하는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막상 성산일출봉 앞에 다가서자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소리를 지릅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정상을 향해 레이스를 펼칩니다. 이런 패턴이 여행지마다 반복됩니다. 어르고 달래고.


파도와 절벽


성산일출봉은 정상까지 500~600개 정도의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아이들을 밀고, 당기고, 파이팅을 외치며 계단을 오릅니다. 선생님은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며 웃습니다. '체력이 국력!' '니들 군대 가서 행군은 어떻게 할래?' 선생님의 나이대가 대강 짐작이 가네요. '체력은 무슨... 반도체가 국력이죠.'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모든 학생이 성산일출봉의 멋진 풍광을 보면 좋겠지만, 평소에 운동이 부족했던 친구들에게는 제법 벅찬 코스입니다. 팔을 부축하고, 등을 밀고, 함께 심호흡을 하지만 정상은 도저히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뒤처진 아이들은 대체로 풀이 죽어있습니다. 부끄럽고, 화도 나고, 원망(여길 왜 온 거예요! 도대체!)도 생길 겁니다.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니지만 오늘 하루는 놀림거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10대 또래 문화 속에선 결코 작은 일이 아니죠.


수십~수백 명의 학생들을 인솔하면서 꼭 이름을 외우게 되는 친구들은 낙오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정상을 뒤로한 채 터덜 터덜 내려가다 보면 학생들이 꼭 묻습니다. "쌤은 뭐 하는 사람이에요?" 제주에 살며 서울말을 쓰고 긴 머리를 바짝 묶고 밴드를 두른 남자 지도사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미술 전시회를 준비 중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동그랗게 변합니다. 제 말이 끝나자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말합니다. 조심스레 미완성 계획안을 내보여줍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묻습니다.


출구에 이르자 낙오한 학생들은 다시 친구들 사이로 섞여 듭니다. 자유시간이 끝나고 버스로 하나둘 모여들 때, 버스 앞에 서있는 저의 손에 무언갈 쥐어줍니다. "쌤 고마웠어요!" 조금 전, 같이 되돌아 내려왔던 학생들입니다. 제 손 안에는 한라봉 주스, 감귤 초콜릿, 별난 기념품이 쥐어져 있습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마주칠 때마다 하이파이브를 나눕니다. 주변 친구들이 부러워합니다. 아이는 어느샌가 선두에 서있습니다.


홀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시기에 이르지 못한 아이들에게 새로운 어른과의 만남은 하나의 여행과 같습니다. 어떤 어른들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새로운 관점을 공유합니다. 나이는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색다른 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린 성공을 빌어주는 친구가 됩니다. 표현은 서툴더라도 꿈과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는 아이들은 빛이 납니다.


선물 받은 한라봉 주스를 한 모금 들이킵니다. 코 묻은 용돈은 저의 손에서 코 묻은 빚이 됩니다. 아마 이 빚은 다른 학생들에게 갚게 될 겁니다. 다음 여행지, 다음 학교. 일출봉을 함께 오르며 어르고 달래야 할 새로운 학생들에게.


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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