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뜨르 비행장은 서귀포에 위치한 버려진 비행장입니다. 태평양 전쟁 시절 제주인들을 강제 동원하여 만든 거대한 비행장은 싱그러운 무와 배추 아래에 잠들어있습니다. 밭 사이로 이어지는 올레길을 따라 작은 동산을 오르면 텅 빈 고사포 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상상을 해야만 합니다. 오래된 상처는 작은 반점으로 남습니다. 점을 보며 뜨거운 생채기를 떠올립니다. 이곳에 떨어진 뜨거운 한숨을 서늘한 바람 아래에서 가늠합니다.
버스가 멈추자 학생들을 향해 다시 한번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이곳은 다크 투어리즘, 제주인들의 상처가 담긴 공간입니다. 아주 오래된 유적지와는 다르게 이 장소는 아직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보다 엄숙하고, 정숙한 자세로 관람을 했으면 합니다." 눈빛이 조금 달라집니다. 경계심. 행동에 제약이 걸리면 예민해지기 마련입니다. "궁금한 점은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하차하겠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이곳저곳에 솟아있는 격납고가 보입니다.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우리는 한없이 펼쳐진 밭과 돌담 사이를 달려왔습니다.
안내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곳은 집중하기 어려운 아쉬운 여행지입니다. 넓은 지역에 흩어진 보이지 않는 포인트. 무더위가 더욱 굼뜨게 움직이는 서귀포에서 이 넓은 지역을 다 돌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사포 진지와 격납고. 수학여행의 다크투어리즘은 이 정도로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비행장 이전, 비행장 이후. 이곳은 언제나 노동의 현장이었습니다. 일제와 시대의 명령으로 땅을 다졌던 제주인들은 지금도 이곳에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립니다. 노동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살기 위해서 땅을 파헤칩니다. 이곳의 땀냄새는 짙습니다. 단순하여 명확하게 느껴집니다.비행기가 떠난 격납고는 농민들의 창고로 쓰이다 다시 비워졌습니다. 비행기 모형 하나만이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주렁주렁 단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제주 사람들이 불쌍해요", "일본은 역시....". 전쟁의 잔해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칠까요? 강제로 노역에 참여한 이들 세상을 떠났고,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전쟁은 승전국도 패전국도 없으며 살아남은 자뿐이라는 격언이 떠오릅니다. 살아남은 이들이 일군 땅에서 배추와 무가 자랍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축 늘아진 이파리는 빗줄기가 간절해 보입니다. 안식은 망자들의 몫입니다. 수확철이 다가옵니다.
알뜨르 비행장. 학생들에게 설명 한마디가 쉽게 나오지 않는 장소입니다. 여러 번 찾아보고 공부한 자료를 한쪽 손에 들고 마지막까지 고르고 고른 정보를 담백한 단어로 풀어냅니다. 그러다 이곳이 교실이 아닌 현장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뱉어내려던 말을 거두고 앞장서서 소리 없이 걷습니다. 가끔 뒤를 돌아봅니다. 학생들은 한 줄로 잘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다른 여행지에서보다 훨씬 더 조용한 목소리로 소곤대며 걷습니다.
분노를 추동하는 텅 빈 목소리를 듣기 전에, 적막한 대지를 걸으며 흙의 냄새를 맡을 필요가 있습니다.흙에서 흙냄새가 느껴질 때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격납고 콘크리트는 잘게 부서집니다. 고사포 진지 아래 양민 학살터에는 하얀 국화꽃이 놓여있습니다. 비석에는 너무 많은 이름들이 적혀있습니다.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차오릅니다. 노인들은 떠나고 아이들이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