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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굼부리, 억새밭과 산담

질문이 이끄는 시선

by RNJ


대비되는 풍경

들쭉날쭉한 오름선이 저 멀리 보입니다. 분화구, 산담, 억새밭이 덩이진 상태로 바다까지 이어집니다. 제주에 있는 어떤 오름을 가던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산굼부리에는 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옵니다. 가장 깔끔한 오름. 산굼부리는 정돈되고 차분한 관광지입니다. 신발을 더럽히는 말똥도 없고, 인적이 드물어 길을 헤멜 이유도 없고, 정상까지 완만한 산책로가 잘 닦여있고, 입구에서는 감성 넘치는 기념품 가게와 카페가 이리오라 손짓합니다. 단체 관광객을 받으려면 꽤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산굼부리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사람의 손이 꽤 많이 닿아있는 인공 오름 공원에 가깝습니다. 도구로 닦인 세련미가 있는 오름이며, 넘치는 욕심으로 자연의 빛을 잃은 이질적 공간은 아닙니다. 다큐멘터리보다는 자연-전기(傳記)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분화구 정상으로 곧게 뻗어있는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독특하고 재미있는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좌측에는 거대한 산담, 우측에는 붉은 억새밭이 넓게 펼쳐집니다. 비와 바람에 무뎌지는 죽은 자의 공간과 붉게 타오르는 가을의 정기. 생과 사의 대립처럼 보이기도 하고, 인간의 유한함과 자연의 무한한 순환성의 대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상에서 단체 사진을 찍은 학생들은 자유롭게 흩어집니다. 주로 억새밭에 모여 사진을 찍고 "볼 거 없네"하며 입구를 향해 터덜 터덜 내려갑니다. 인스타용 사진과 동영상을 남기기 위해서는 5분이면 충분합니다. 해시태그 고민하면서 또다시 5분. 업로드는 1초. 호기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으나 방향을 찾지 못한 학생들은 저의 꽁무니를 뒤쫓아 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무엇을 봐야 하나요?" 이런 학생들은 언제나 극소수였습니다. 힐링과 휴식이라는 키워드에 지배받는 현대 여행 패러다임에서 고개를 돌린 채 무언갈 배우고 느껴보겠다는 의지는 사랑스럽습니다. 저 또한 그런 여행을 좋아합니다. 시류에 무작정 반항하기보다는 매사에 쉽게 순응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교실을 벗어난 수학(修學) 여행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작동합니다. 이어지는 반동을 느낍니다.


산굼부리의 하이라이트는 산담과 구상나무 숲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지역의 산을 오르던 붉게 타오르는 억새를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제주의 산담과 한국 고유종 구상나무 숲은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알고자 하는 노력과 발걸음이 필요한 숨겨진 뒷마당 같은 공간입니다. 앞마당은 자부심을, 뒷마당은 친밀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인적이 점점이 끊기고 능동적인 여행객 몇몇이 남을 때 한시적인 자유가 찾아옵니다. 어떤 이들에겐 단체 여행이 너무나 인위적이라 느껴집니다. 이런 뒷마당은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는 섬세한 손길처럼 찰나의 숨 쉴 여유를 제공합니다. 자연적이며 인공적인 산굼부리는 절묘한 균형의 미학을 가르칩니다.


사계절 변하지 않는 얼굴과 붉은 가을빛을 뿜어내는 표정. 산담과 구상나무 숲은 산굼부리의 얼굴이고 억새는 쓸쓸한 표정이었습니다. 산굼부리라는 *거대한 이름에는 걸맞지 않게 굼부리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관광객이 모입니다. 굼부리는 태고에 멈춰버린 심장입니다. 온 천지를 붉게, 푸르게 물들였던 거대한 폭발의 흔적은 더 이상 세상의 이목을 끌지 못합니다. 장성한 나무와 관목아래로 더욱 깊게 침식되는 느슨한 구멍. 이곳에는 물이 잘 고이지 않습니다. 물은 빠르게 땅 속으러 스미어 건천을 적시고 용천수로 솟아 바다로 되돌아갑니다. 가장 강력하고 격렬했던 움직임은 시간 아래, 분화구 아래 깊숙이 잠들어 있습니다.


* 가장 깊은 굼부리(분화구, 제주어)를 가졌다 하여 산굼부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산굼부리에서 우리는 탄생과 흐름, 소멸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는 독립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함께 흘러가는 듯 보입니다. 우리의 손길이 닿던, 닿지 않던. 쉼 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천천히 흘러갑니다. 사유의 되새김은 여행의 진수입니다. 사유의 발견은 우리에게 진정한 공감을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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