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또는 미래의 인간의 필요를 반영하여 닦입니다. 길은 어딘가로 우리를 안내하지만 종종 목적지를 알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비뚤고 거친 길이라도 우리에게는 걸어갈 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길을 잃기 위해서도 길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길이 없다면 우리는 방향 없는 자유를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곧장 뻗어있지 않은 올레길은 그런 점에서 유익한 길입니다. 길을 잃은 이들에겐 이길 또한 절실한 길입니다.
'수학여행을 제주도까지 와서 이게 뭡니까!', '얼마나 더 가야 해요!'라는 날 선 질문이 나올 때, 저는 항상 오름이나 올레길 위에 서있었습니다. 학생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표정으로 요동치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때. 저는 그저 웃습니다. '다 왔어요' 물론, 거짓말입니다. 정상과 버스는 아직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습니다. 때론 모르는 게 약입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은 피가 끓는 정도에 관계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목적지까지 15km. 주행에 익숙한 어른들에게는 짧은 거리입니다. 걸음이 익숙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학생들에게는 아주 먼 거리입니다. 올레길 한 코스가 대부분 10km가 훌쩍 넘기에 수학여행에서는 가장 액기스 3km 남짓을 걷습니다. 그래서 수학여행을 위한 올레길은 토막 난 제주 갈치처럼 짧고 생기가 없습니다. 즐거움과 권태로움, 어느 것 하나 느껴지지 않을 때 올레길이 끝납니다. 우린 언제나 조급함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마냥 즐겁기엔 다소 길고, 권태롭기엔 너무 짧았습니다. 섣부른 감정도 최소한의 시간이 주어져야 합니다.
학생들과 올레를 걸으면 학생들은 행군을 합니다.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고, 경사길에 한탄하고, 흙먼지가 풀풀 일어나 절로 인상이 찌푸려집니다. 날씨는 덥고, 햇빛은 따갑고, 목은 칼칼해집니다. 다음 일정을 제시간에 소화하기 위해서는 짜리 몽당 단기 속성 올레길을 빠른 속도로 주파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 조급함마저 느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걸어야 하기 때문에 걷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가장 올레길 여행자다운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무작정 걸어보는 것. 그리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
툴툴거리는 와중에도 아이들은 대화가 아닌 질문을 합니다. 학생은 어쩔 수 없는 학생입니다. 딱딱한 질문이 낯선 길 위에서, 낯선 사람을 향한 대화로 이어집니다. 길을 다 걷고 난 다음에 우린 어색한 친구가 되어 있습니다. 버스에 타기 직전 저는 질문을 합니다. '제주도 다시 올 거예요?' '와야죠. 그런데 올레길은 절대 안 와요.' 가장 열심히 뒤 따라 걷던 이 학생은 아마 올레길로 다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땀냄새가 묻어나는 추억이 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면, 몸을 어색하고 뻣뻣하게 세워서라도 다리를 조금 뻗어보기 마련입니다. 이곳에서 길 잃은 자의 미덕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저와 학생들은 젊고 튼튼한 혈관을 통과하는 맑은 피처럼 올레길을 건넜습니다. 탄성이 떨어지고 점성이 높아지면 아마 걸음도 풍경도 느려지겠죠. 학생들은 올레길을 걷기에는 너무나 젊고 뜨거웠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올려봅니다. 달아오른 귓불을 만져봅니다. 저에겐 너무나 빠른 걸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나의 길에는 이미 많은 플라크가 껴있었습니다.
종종 혼자 올레를 걷습니다. 인파로 가득 찼던 올레는 본래 이 길의 주인인 바람과 햇빛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바람의 길을 막고,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는 나 하나뿐이었습니다. 홀로 서있는 나에게 올레길은 느리고 느린 여행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