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는 결사항전과 최후의 몸부림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모두 품고 있습니다. 진영과 이념, 이론 같은 도구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전자와 후자의 평가 모두 질문이 아닌 답변만을 던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숨을 잃은 영령들에게 전체주의적 해석을 덧붙이는 일이 도둑질처럼 느껴집니다. 듣는 이 없이 말하는 이들만 있습니다. 전투가 벌어졌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본다." 죽음 앞에서 많은 것들이 무용해집니다.
쇠와 피로 덮인 무덤 위에서 역사를 쓸 수 있었을까요? 한 개인의 최후는 국가로부터, 사가(史家)로부터, 특정 집단으로부터 수백 년간 쉼 없이 도굴당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해를 넘어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600만의 난민과 30만 명의 사망자. 지금 이 순간에도 항전과 몸부림, 전진과 후퇴가 이어지고 있을 겁니다. 피폐해진 현재와 노략질당한 미래. 언젠가 그곳에도 봄이 찾아올 겁니다. 유채와 메밀, 해바라기가 만발한 항파두리처럼. 우리는 비극의 간극에서 살아 숨 쉬는 운 좋은 중생들일뿐이었습니다.
모두가 자신만의 창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국가의 시각에서 지역의 시각으로, 집단의 시각에서 개인의 시각으로. 어딘가의 일부로만 존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말처럼 우린 전체이자 부분입니다. 많은 권력자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항파두리에 사진을 남기기 위해 찾아왔다고 합니다. 예산 부족으로 수년째 발굴 작업이 지지부진하고 있다는 말이 이어서 들려옵니다. 부분은 여전히 묻혀있고, 전체는 침묵합니다.
단체사진을 찍고 학생들과 함께 토성길을 걷습니다. 꽃밭에 모여 사진을 찍습니다. 어떤 학생도 해바라기를 꺾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