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시간과 동행인의 숫자가 통제되었던 코로나 시대는 문화예술계에 아주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전시장은 관광객뿐만 아니라 예술가와 공연가도 함께 떠나게 만들었죠. 사람이 사람과 멀어져야 하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빠른 속도로 도입되었습니다. 이젠 미디어 아트가 없는 순수한(=고전적인) 전시장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되자, 제주도에도 관광객이 돌아왔습니다. 공연자의 빈자리는 새로운 기술, 영상과 음향 시스템이 차지했습니다.
GhatGPT는 무언가 달랐습니다. 오픈 AI가 공개한 야심작은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길만했죠. 뛰어난 기술력을 갖춘 기업들이 새로운 도구에 담긴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코딩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팸플릿을 제작합니다. GhatGPT는 두 달 만에 1억 명의 사용자가 몰렸고, 구글이 야심 차게 공개한 바드는 허점을 드러내자마자 주가하락이라는 부메랑을 얻어맞았죠. 잠재력에 대한 기대와 의구심의 동행. 미래를 바라보는 인간은 때론 균형과 모순을 모두 갖춘 양가감정을 가질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기술의 변화와 시대의 요구는 혁신을 일으킵니다. 로봇이 짬뽕을 서빙하고, 태블릿이 주문을 받습니다. 높아진 인건비와 규제는 자동화의 필요성을 대두시켰고, 코로나는 카뮈의 오래된 책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렸습니다. 무언가 뒤죽박죽 섞일 때, 인간은 쓸모 있는 물건을 종종 세상에 내어놓았습니다. 학생들의 발걸음을 따라 푸르고, 붉은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갑니다. 빛이 쏟아지는 자리에 물기 없는 폭포가 생깁니다. 우리는 세상을 방문하지 않습니다. 이젠 세상을 호출할 수 있는 시대에 도달했습니다. "미학과 광학과 시학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미래의 예술과 산업을 상상하며 관람하세요" 버스에서 학생들에게 빼먹지 않고 꼭 하는 멘트입니다.
많은 이들이 신기술을 양자역학처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크게 놀랍지는 않습니다(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상상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법이죠. 고전적인 개념과 새로운 시대 사이의 간극은 여태까지는 나름 쓸만했던 우리의 회로를 엉망진창으로 섞어버립니다. 영상과 체험은 세상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미디어아트 전시장은 미래가 아닌,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와 매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공연장을 가득 메운 영상을 지켜봅니다. 용기 있는 학생은 무대와 예술에 직접 참여합니다. 거대한 공연장이 우리의 동작을 어떻게 인식하고, 자연에서 어떤 감동과 영감을 빌려왔는지. 이곳을 침묵을 지킬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몸짓조차 예술의 일부가 되는 새로운 시대의 전시장입니다. 장벽이 사라지고 그 잔해를 넘어설 때, 우리는 기존의 세상을 처음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경험을 배우려고 하지 말 것.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마지막 페이지에 제가 써 놓은 말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아주 훌륭한 속담이 함께 떠오르네요. 페이스북이 왜 메타로 사명을 변경했고 애플의 비전프로에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명확한 수치나 법칙으로 계량하고 이해할 순 없지만, 무언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간결하게 느껴집니다. 무너진 장벽을 보며 희망을 품은 독일인과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파쿠르를 하던 레바논의 젊은이들이 떠오릅니다. 지독한 진통을 겪었다면 이제 새로운 빛을 만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