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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수목원, 마지막 휴게소

by RNJ


평소보다 일찍 아이들을 깨웁니다. 오늘은 한라산을 넘어 섬 반대편 공항에 가야 합니다. 모두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 학생, 선생님, 버스 기사님, 그리고 저까지.


가끔 산책을 하러 찾아가는 한라 수목원이 수학여행의 마지막 여행지로 결정될 때가 많았습니다. 공항과 가깝고, 주차가 쉽고, 입장료도 없는 인솔자의 입장에서 아주 손쉬운 여정. 딱 하나 빠진 것은 바로 학생들의 취향이죠. 365일 등산복을 입고 다니는 부장 선생님의 입꼬리만 슬며시 올라가는 기울어진 여행지... 노장(老將)은 가장 말을 듣지 않았던 학생을 선별하여 원정대를 꾸리고 광이오름을 힘차게 오릅니다. 늦은 밤, 호텔에서 부장 선생님에게 건수(?) 하나씩 잡힌 아이들은 힘없이 정상까지 질질 끌려갑니다. 죄인은 대체로 말이 없기 마련이죠.


예약과 조율이 필요한 골치 아픈 여행지에 비하면 동네 뒷산 해설은... 누워서 떡먹기랄까요? 발자국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익숙한 장소를 해설할 땐... 집에 새로운 직장 동료를 초대하는 기분입니다. 울창한 대나무숲과 연꽃이 피고 지는 고요한 못. 손을 조금만 뻗어도 원하는 풍경이 잡히는 친숙한 수목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등장하는 '노루'를 미끼 삼아 아이들을 이곳저곳으로 꼬십니다. 광이 오름에 오르면 신제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죠. 짧은 섬 소풍에서 인솔자가 가장 먼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소나무 사이로 웅장한 한라산의 자태가 드러납니다. 한라수목원은 수학여행의 마지막 쉼표입니다.



여행에도 테이퍼링이 필요할까요? 독한 약물의 용량을 천천히 줄여 부작용을 예방하고, 양적 완화의 규모를 단계별로 조절하여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예방하듯이 여행에도 호흡과 템포가 중요합니다. 한라 수목원은 소화기관의 대장과 가장 비슷해요. 학생들의 마지막 땀방울이 이곳에 짠맛과 수분을 더합니다. 다음 과정은 일상으로의 배출이죠. 오늘 안전하게 집으로 도착한다면 내일은 좋든 싫든 다시 학교에 가야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의 무게는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뜰 때 느껴지는 감정이 해방인지 구속인지에 따라 결정되죠. 저의 퇴근길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수능 전에 마지막으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찰나의 여흥이었습니다. 제주 도심을 함께 내려다보며 학생은 도약하는 비행기를 바라보고, 노동자는 우거진 빌딩 속에 숨은 집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었습니다. 익숙한 풍경은 감정에 낀 피로를 벗겨냈지만. 학생들의 표정에는 해소되지 않은 미련이 묻어있었습니다.


일찍이 수목원 주차장에 내려가 아이들을 기다립니다. 인원 체크가 끝나자 버스가 바삐 출발합니다. 굽이지고 기울어진 도로를 따라 도심을 파고든 버스가 공항과 가까워지면 학생들에게 마지막 멘트를 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습니다. 처음 학생을 인솔할 땐 미리 준비한 딱딱한 멘트를 외워서 읊조렸습니다. 수백 명의 아이들을 떠나보낸 지금은 매소드 연기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이별의 공허함은 내일 만날 새로운 아이들로 채워집니다. 퇴근의 향기에선 삶의 애수가 느껴집니다. 고속도로의 마지막 휴게소는 커다란 대로 건너편의 첫 번째 휴게소를 마주 보기 마련입니다. 짧은 소풍이 또다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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