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그림은 대체로 어두웠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 밝다 느껴질 정도로.
소파 뒤편에 걸려있던 거대한 유화는 잿빛 금속 액자 속에 갇혀 있었다. 일생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냈던 아버지는 배와 바다를 즐겨 그렸다. 포구의 볼라드와 어선의 비트는 물론이고 홋줄까지 생생히 묘사한 포구엔 인간의 흔적만이 가득할 뿐, 아버지는 단 한 명의 사람도 그려 넣지 않았다. 그나마 밝은 느낌이 들었던, 주방 벽면에 걸려있던 금빛 액자 속의 배는 돛을 모두 접어두고 있었는데 바람이 거세게 부는지 돛대가 선미를 향해 팽팽히 휘어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다는 물거품 하나 보이지 않았고 호수처럼 잔잔해 보였다.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었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뱉어본 적은 없었다. 그 시절의 경상도 남자답게 회초리를 들고 한글을 가르쳤던 자상한 아버지였고, 좋아하는 그림까지 손바닥을 맞아가며 배우고 싶지 않았었다. 나는 어떤 종이든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풍경화, 만화, 추상화 가리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죄다 도화지 위에 쏟아부었고 자연스레 만화가를 꿈꿨다. 내가 과학 영재원에 입소한 이후로 아버지는 내가 한의사가 되길 강력히 희망했다. 이로 인하여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졌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한 번쯤은 이야기를 해봤어야 했다는, 때늦은 후회가 지금의 나를 질책한다.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던 탓에 나의 그림 도구는 지금까지도 연필이나 색연필 따위에 머물러 있다. 첫 전시회는 펜화를 걸었고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뾰족한 미술 도구는 죄다 서랍 구석에 봉인하였고 책상 위에는 크레파스 한 통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아이 엄마는 분만실을 우리의 그림으로 꾸미길 희망했고, 카페에 앉아 아이를 생각하며 이런 저런 그림을 슥슥- 그렸다. 금실이 없어 뜨개실에 우리의 그림을 걸었고 위생이 중요한 장소라 고추도 그림으로 대체했다. 냉기가 서려있던 분만실에 모셔진 아내가 조금이나마 이 공간을 따듯하게 느끼길 바랐다.
신생아는 시력이 아주 나빠 눈 앞에 있는 대상의 실루엣만 얼핏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 아이가 우리의 그림을 처음 본 시기는 우리가 첫 이사를 마친 후, 아이의 방을 새롭게 꾸미던 때일 것이다. 가장 작은 아이가 가장 큰 방을 차지했고, 오후에 들어오는 햇빛을 막기 위하여 창문 한 켠에 우리의 그림을 가득 채웠다. 아이는 그림을 가만히 보기도 했고 아직 잘 작동하지 않는 손을 뻗어 그림 속의 꽃과 말을 움켜지고자 애를 쓰기도 했다. 이때부터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로망을 아주 조금 가지게 되었다.
보다 넓은 집으로 이사할 때 여러 이유로 기뻤고, 그중에서도 우리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작은 갤러리를 만들 수 있는 예쁜 조명이 달린 흰 벽이 있다는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아이의 태반 프린팅과 전시회에서 외면받은 그림들, 그리고 아내가 만든 시계를 몽땅 모아 한 번에 걸어버렸다. 이곳저곳 필요에 따라 옮겨지던 그림들이 우리 가족처럼 온전히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아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올해로 한국 나이로 3살이 된 아이는
어린 시절의 집을 조금씩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빠와 엄마의 작품이 걸린 하얀 벽, 내가 거실에 걸린 아버지의 그림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