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2023)
그림은 침묵의 시이며
시는 언어적 재능으로 그려내는 그림이다.
시모니데스
텅 빈 벽을 바라보며 상상에 빠진다. 여기에 무엇을, 어디까지 채워야 할까? 막막한 감정선에 우연히 불순물 하나가 섞여들 때, 이를 촉매로 삼은 사고의 평행선이 우려한 모양으로 휘어지곤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성취는 언제나 밑그림 하나 없는 하얀 벽에서 시작되었다. 주저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전시를 시작하기 전에 답사를 한두 번쯤 다녀와야 했다. 벽의 색감은 어떻고 조명은 어디에 설치가 되어 있는지. 벽에 못을 박아야 할지 레일에 걸어야 할지. 주로 나오는 음악은 무엇이고 사람들의 시선은 주로 어디로 흘러가는지. 6명이 함께하는 전시회이기에 누구의 작품이 어디에 적합한지를 의논해봐야했다. 자연광, 좌석의 배치, 그림의 크기... 7~8개의 벽에 여섯 멤버의 작품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머릿속으로 대강 도안을 그려본다. 거실 바닥에 그림과 시를 놓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전시회 관람이 하나의 여가일 때는 전시회에 필요한 신체, 정신적 노동의 강도를 가늠해 본 적이 없었다. 대소사를 막론하고 마음을 쏟으면 쉬이 완성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어째 어째 전시할 위치가 정해지면 높이를 고민해야 한다. 높이가 정해지면 수평을 맞춰야 했다. 작품 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전체적인 구도가 흐트러진다. 다시 흰 벽으로 돌아왔다.
초심자의 사전 계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끝이 보이지 않는 T-익스프레스 대기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의 눈은 생각보다 기민하지 않고 제한을 두지 않은 사유의 견고함은 두부의 경도를 넘어서기 힘들 때가 많았다. 이럴 땐 도안과 자를 던져놓고 마음과 손의 감각을 믿어야 했다. 계속해서 시도하며 마주한 후퇴의 반복에서 빛나는 선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X선을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라고 말했던 뢴트겐이 떠올랐다. 나의 인생은 언제나 플랜 B에서 한보 전진했었다.
기억에 오래 살아 남는 작품의 공통점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특수성과 보편성이 모두 존재했던 것 같다. 독창적인 기법, 기막힌 구도, 그리고 질서와 위치 선정. 갤러리의 입구에서 그림이 걸릴 벽까지 관람객처럼 걸어보았다. 그림 하나하나를 스치며 지나온 시선이 다음 장소를 흘겨볼 때 무엇을 기대할까? 재미 또는 신선함? 진부하지만 일리 있는 원칙의 선을 살짝 넘어서는 불안한 시도를 목격할 때, 정적인 작품에서 요동치는 활력과 극적인 해소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액자 한 점 없이 그림을 걸었고 스케치북에 시를 출력했습니다. 캡션은 하나의 그림으로 대체했습니다. 첫 만남에 절반의 실루엣만 목격할 수 있게 전체 작품을 통째로 우측으로 옮겼습니다. 은은한 노출이 욕망과 호기심을 자극하길 바라며.
그림에는 제주의 이야기를 담았고 내면의 이야기는 시에 그렸습니다. 압축과 조화라는 큰 테마 아래에서 하나의 통일성을 갖추기 위한 노력은 작품의 즉흥적인 배치로 인해 중구난방함으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도기와 자로는 만들 수 없는 새로운 오선지가 만들어졌습니다. 우연히 완성된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커졌다는 나르시시즘적이며 낙관적인 태도로 (눈을 감고) 전시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때론 실눈을 뜨고 보아야, 멀리서 흐릿하게 스치듯이 만나야 아름다운 법입니다!
데미안이 종이 위에 베아트리체의 영혼을 창조하고, 융합과 포용이라는 거대한 원칙 아래에서 태어난 재즈와 로큰롤이 전 세계 사람들의 귓가를 때렸듯이 섞고, 좌절하고, 다시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기존의 질서는 분열했고, 이 과정에서 기민한 이들은 새로운 규칙과 이탈하는 작은 에너지를 발견합니다. 아류(亞流)로 사라질지, 아류(我流)로 기억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전시회는 최소 한 사람의 인생에 큰 벽곡점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끝까지 달려온 작가에게.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멤버들은 서로의 그림을 바라보며 감상의 폭을 넓혔고, 손님은 나름의 사명감을 품고 낯선 세상을 해석합니다. 소중한 발걸음은 창작자의 고뇌와 노력을 대가로 합당한 보답을 받습니다.
제주의 풍경을 새롭게 발굴한 김영갑 작가는 생전에 '시가 그림이고, 그림이 시다!'라는 말을 우아해 멤버인 안작가님에게 해주셨다고 합니다. 결국 핵심은 본질이고 형태는 옵션일 뿐이었습니다. 정신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가장 아름다운 길을 제시하는 일은 결국 예술가의 몫이었죠. 전시는 인간의 가장 전통적인 대화법이자 성찰의 시금석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곰팡이로 가득했던 고시원 벽을 그림으로 채운 습기 가득한 추억을 떠올려보면, 전시가 목적인 멀끔한 벽을 채우는 일은 식은 아메리카노 마시기였습니다. 고단한 기억이 현재를 더욱 빛나게 만들지만, 기쁨의 첫맛과 이어지는 씁쓸한 뒷맛이 혀 끝을 얼얼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네요. 아무튼, 방구석 그림쟁이 데뷔에 성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