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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돈종차별

by RNJ


"백돼지 줍써!"


식당에서 삼겹살을 주문할 때 돼지의 피부 색깔을 골라야 하는 지역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겁니다. 흑돼지가 백돼지보다 30% 이상 비싸기에 외식메뉴로 백돼지를 선호하는 도민이 많 수밖에 없는 상황. 큰맘 먹고 제주도를 찾아온 여행객은 돈을 조금 더 써서라도 제주산 흑돼지 전문점을 찾아갑니다(비행기값이 얼만데!). 삼겹살, 두루치기, 돈가스, 돔베고기, 갈비찜, 피자... 관광지 주변에선 흑돼지가 메뉴에 빠진 식당을 찾아보기가 어렵죠. 대단한 명성과 입소문 덕분에 당연히 제주도 수학여행에도 흑돼지가 빠지지 않습니다.


시뻘건 양념으로 범벅된 흑돼지 두루치기를 흡입하는 아이들. 무엇이든 잘 먹는 사춘기 학생들은 밥그릇이 부서져라 숟가락을 휘두릅니다(고기 볶는 주걱으로 밥을 먹는 아이들은 생각 이상으로 많습니다). 아이들의 입장에선 흑돼지냐 백돼지냐,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수학여행에서 만나는 돼지는 고추장을 뒤집어쓴 적(赤) 돼지에 더 가깝죠.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목에서 받는 유일한 질문은


"쌤! 거기 무한리필이에요? 공깃밥은요?"


제주에 만연한 돈(豚)종 차별을 무안하게 만드는 존재는 바로 배고픈 10대입니다. 학교에서 10분 만에 밥을 해치우고 옆구리에 공을 끼고 운동장에 뛰어나가는 아이들이 불판 앞에서 1시간이 넘도록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장님은 점점 말수가 없어지고 인솔자는 다음 일정이 틀어질까 노심초사하지만, 고소한 돼지기름을 맡은 아이들은 가게 마당을 한 바퀴 가볍게 뛰고 다시 테이블에 앉습니다. 소화 끝!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불판 사이를 걸어 다니다 보면(애들아 다 먹었니? 다음 일정이...) 저의 독촉을 막기 위해 쌈을 크게 싸서 입에 넣어주는(= 막아버리는) 학생들이 꼭 있습니다. 맛있습니다! 함께 고기를 뒤집으며 인솔자와 학생은 일정 지연의 공범이 됩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애들을 굶겼습니까?"


고기를 받기 위해서 끝없이 줄을 선 아이들을 두고 식당 이모님들이 꼭 한 마디씩 하십니다. 1시간 전에 먹은 핫도그, 감귤스무디, 닭꼬치는 결코 제로-칼로리 식품이 아니었죠. 선생님들은 타박 한 마디씩(다이어트 안 하니? 이젠 위가 아니라 옆으로 큰다?) 슬쩍 건네며 주걱으로 특제 볶음밥을 박박 볶아줍니다. 학생들은 어른의 연륜(=짬밥)을 밥상머리에서 혀끝으로 배웁니다. 글라스에 사이다를 가득 채워 들이키는 아이들은 오늘밤에 주의 깊게 봐야 하는 주요 용의자입니다(얼굴 봤다).


섭지코지, 돈내코 계곡처럼 제주어가 포함된 낯선 이름은 아무리 불러줘도 학생들의 머리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 달 급식 식단표가 나오자마자 형광펜으로 치팅데이를 선별하는 중생들은 '흑돼지 먹는 날'만큼은 결코 까먹지 않습니다. 돌아가는 날 공항에서 묻습니다. '다음에 또 가보고 싶은 곳 있니?' '두루치기, 삼겹살 집'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옵니다. 이를 쑤시며 가게 명함을 챙겨 온 학생은 다음 가족 휴가에 자신의 지분을 확보하고자 목소리를 한껏 높일 겁니다.


배가 띵띵하게 부른 아이들은 그제야 식당의 메뉴판을 바라봅니다. 고깃집에서 자기 지갑을 열 일이 없는 학생들은 백돼지와 흑돼지의 가격 차이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쌤! 왜 흑돼지가 더 비싸요? 맛이 달라요?"

"근데 이거 흑돼지는 맞아요? 다 벗겨놨는데?"

"제주도 똥돼지 들어봤는데, 그거 맞죠?"


사실 우리가 제주에서 먹는 흑돼지가 토종 재래종은 아닙니다. 수차례 교배를 통해서 만들어진 흑돼지는 새끼를 많이 낳고 빨리 자라는 백돼지 사육에 비해 불리한 점이 많습니다만, 흑돼지가 제주도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덕분에 가격에 프리미엄이 붙고 이에 따라 흑돼지 사육의 불리함이 어느 정도 상쇄되죠. 껍데기를 제거하지 않은 제주 오겹살이 서울에서 인기를 끌자 가공에 손이 덜 가는 오겹살이 더 비싼 상품이 된 것처럼 음식의 가격은 다소 의아함이 물씬 풍기는 이유로 결정되곤 합니다. 무엇이든 넘쳐나는 현시대의 일부 상품은 역으로 가격이 프리미엄 특산물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자영업자들은 차별점을 만들기 위해 제주도에서 채취한 고사리, 더덕, 표고버섯을 양념에 함께 버무립니다. 새로운 맛과 조합으로 승부를 보는 도민 맛집이 많지만 흑돼지라는 '스펙'만으로 관광객을 얼어붙게 만드는 가게가 산재한 것도 사실입니다. 물고기와 달리 '자연산' 딱지를 붙이기 힘든 육고기는 '피부색'이라는 다소 독특한 마케팅 전략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제주도의 똥돼지는 1970년대 제주 관광 활성화를 기점으로 사라졌고 현재 제주에서 사육되고 있는 제주도 흑돼지는 교장 선생님보다 역사가 짧습니다.


제 고향 부산에는 '뒷고기'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식당이 많습니다. 정육을 하고 남은 돼지고기를 모아서 연탄 불에 구워 먹는 뒷고기는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 시절 최고의 메뉴였죠. 타지에서 친구가 놀러 오면 으슥한 골목길에 위치한 뒷고기집에 데려가 속칭 '문화 체험(뒷고기 + 대선소주)'을 시켜주곤 했죠. 뒷고기집은 대학생, 꼬맹이들을 데려온 부모님, 나이 지긋한 노인으로 가득했습니다. 부담 없이 즐겼던 뒷고기 이제 특수부위라는 새로운 직함을 달고 고급화 전략에 뒤늦게 편승했죠. 이젠 전문가, 전문부위가 아닌 것이 없는 모든 것이 특별한(그리고 비싼) '온리원'과 '스페셜리스트'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제주도에 지인이 방문하면 서문 시장에 위치한 정육 식당에 데려갑니다. 그리고 한라산 한 병, 백돼지 한 접시를 주문하죠. 웨이팅이 수십~수백 팀에 이르는 관광객으로 가득한 식당을 지나치며 흑돼지는 제주도가 아니라 제주도 관광을 상징하는 문화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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