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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살 위에 세워진 도시

엘리베이터(2023)

by RNJ
엘리베이터(2023)


세상이 모두를 파괴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폐허를 딛고 강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건설의 봄. 신(新) 제주는 다시 한번 새로운 도시로 변하고 있었다. 매 순간 분열을 반복하는 유기체의 성장과 번식처럼 사람과 계획이 몰려드는 신제주는 외적인 팽창과 조밀함을 함께 갖춘 섬의 중심지가 되었다. 쾌적한 주거환경과 일자리를 찾아오는 이들로 제주도의 연동과 노형동에는 인구 과밀화 현상이 발생하고 있고 덕분에 신제주는 맥도널드, 서브웨이, 버거킹(KFC는 아직 없습니다)이 모두 갖춰진 제주 선진 문물 수용의 첨탑이 되었다. 공해와 소음을 벗어나 자연에 다가서고자 하는 사람은 외도와 하귀, 조금 멀더라도 조천으로 거주를 옮기는 추세며, 신제주는 육지 사람이 생각하는 제주도와 가장 괴리감이 큰 장소이자 도시 사람에게는 가장 친숙하며 편리한 도심이다. 또한 이곳은 관광지와 생활권이라는 특성을 동시에 가지는 특이한 교차점이기도 하다.


제주의 강남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드디어 10억 대 분양가를 자랑하는 아파트가 등장했다. 나이트클럽과 외국인 밀집 지역, 신제주 최대 번화가 누웨마루 거리를 축으로 토목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제주도 내 미분양 주택이 최초로 2,000호가 넘었지만 분양가는 서울 금싸라기 땅 못지않은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제주도 근로자 평균 임금은 전국 꼴찌이지만 어마무시한 땅값과 높은 건설비, 상상을 초월하는 월세와 연세(제주도는 1년 치 임대료를 한 번에 받는 경우가 많다)로 청년 세대는 전입신고가 불가한 생활형 숙박시설을 전전하는 형태로 도시에서 살아남고 있다.


"웅-웅-"


글을 쓰는 와중에 재계약 여부를 묻는 문자가 도착했다. 내년부터는 월세와 보증금을 모두 올리겠다는 통보.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제주 부동산 플랫폼인 교차로와 오일장 사이트에 접속했다. 노마드의 삶은 자유가 아니라 방황이라고 표현해야 더 적절할 것 같다요. 어쩔 수 없이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구제주의 부동산을 찾아 전화를 건다. 조금씩 외곽으로 밀려나는 듯한 찜찜하고 개운치 못하면서 익숙한 이 맛은 분명 이전에 어디선가 경험했던 맛이었다.


신제주는 상전벽해,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지역이다. 특히 노형동은 이전에 4.3의 화마가 휩쓴, 깊은 침묵에 빠진 동네였다고 한다.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노형지역은 초토화 작전의 대상지로 선정되었고 도내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마을이 되었다. 소개된 마을의 흔적은 개발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간간이 찾아볼 수 있는 위령비와 마을 표석만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사 깊은 선비마을은 깡끄리 불에 타서 사라졌고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자손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표적을 떼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고 했다. 전란의 불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번영하는 모든 땅에는 선대의 피와 마구잡이로 찍힌 발자국이 근현대사 지층 속에 짙게 남아있다.


바다와 섬만큼 많은 미신이 떠다니는 공간은 없을 것이다. 내가 군함을 탈 때 휘파람 소리는 배가 물에 잠기는 소리와 비슷하다, 신호기 소리와 유사하다, 나쁜 날씨를 몰고 온다는 조금씩 다른 이유가 쌓여 하나의 불문율이 되었다. 제주도에서는 4.3이 하나의 불문율이다. 동양인들이 기피하는 숫자 4는 제주도에서는 보다 더 멀리해야 하는 저주받은 낙인이 되었다. 제주 아이들은 제삿날이 추석이나 명절처럼 모든 집이 같은 날에 치르는 행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생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제삿날은 같은 동네. 외지인들은 4.3 기념관과 유적을 둘러보며 쉽게 분노하고 슬퍼하지만 토박이들은 오히려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섬이라는 폐쇄된 환경에서 가해자와 방관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지독하게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3만 명의 사망자와 27만 명의 생존자. 좋든 싫든 과거를 묻고 다시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수백 년간 차별과 갈등을 품고 바다를 건너온 외지인의 간섭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무명천 할머니의 손때 묻은 자물쇠. 지금은 스노클링 명소로 유명한 판포리가 광기에 휩싸였을 때, 경찰이 쏜 총이 진아영 할머니의 턱을 얼굴에서 떼어내 버렸다. 할머니는 항상 집 문을 단단히 잠그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절대로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재생의 한계를 넘어선 육체는 벽과 자물쇠 너머로 숨어들었고 결국 국가는 사라진 세월과 턱을 대상으로 '거금' 850만 원을 배상했다고 한다. 광란의 역사는 한 시대의 퇴장을 끝으로 조금씩 사라지고 잊힌다. 부모님의 이야기가 마르지 않은 붉은 잉크라면 조부모님의 사연은 세월에 빛이 바랜 아득한 동화가 아닐까. 시간의 바람에 흩어지는 기억의 씨앗들을 하나의 장소로 단단히 모으기 위해 한적한 산자락에 4.3 기념관 같은 건물들이 세워지고 있다.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듯이 제주도는 급격한 성장과 진통을 겪고 있다. 이념의 손가락질 속에서 선인장의 열매를 팔아 살아남은, 여전히 '4'를 외면하고 두려워하는 섬사람들. 1970년을 기점으로 세워진 신도시의 건물들이 하나씩 무너지며 도시가 허물을 벗기 시작한다. 제주의 대문 정낭은 이제 관광지의 소품이 되었고 도어록과 엘리베이터가 새로운 출입구가 되었다. 멸시와 핍박이 가라앉지 않던 섬은 전 국민이 사랑하는 사계절 여행지가 되었다. 뒤집어보면 상처가 없는 곳이 없는 섬, 고층 빌딩이 올라서고 엘리베이터 회사가 군침을 흘리는 블루오션. 정낭 너머로 보이는 시멘트벽과 초특가 분양을 알리는 플래카드. 차로 꽉 막힌 도로와 사라진 인도, 어디에서도 자동차의 위협과 공사장의 소음을 피할 수 없는 매일매일이 새롭고 낯선 도시. 제주도의 차가운 중심부만큼 흑백 그림이 잘 어울리는 곳은 한동안 찾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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