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이(2023)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 주마!
<모비딕. 1851>
구정물과 비린내로 가득한 울퉁불퉁한 도로. 생선 대가리를 후려치는 둔하고 녹슨 칼. 까만 비닐봉지에 소금을 뿌리는 주름으로 가득한 손. 아이의 시선에서 좌판의 물고기는 전장에 널브러진 시체와 다름이 없었다. 말라가거나 죽어있거나. 부산을 떠난 지 5년이 훌쩍 넘었지만 자갈치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어린 시절, 나는 자갈치 회센터 1층에 빽빽하게 들어선 큼지막한 활어 수조가 있는 횟집을 참 좋아했었다. 수족관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열대어는 없었지만 몸뚱이에 비해 턱 없이 작은 지느러미가 만드는 물고기의 유려한 헤엄에서 눈을 뗼 수가 없었다. 못생긴 물고기 이름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도 재미였다. 장난기 많은 사장님은 가장 팔팔한 물고기 한 마리를 수조에서 건져내어 불쑥 코 앞에 들이밀곤 했었다. 운이 좋으면(물고기들은 운이 나빴겠지만) 백과사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상어나 개복치도 만날 수 있었다. 갈고리에 찍힌 거대한 물고기는 바닷물이 고인 시장 바닥에서 이곳저곳으로 힘없이 끌려다녔다.
포구를 따라 이어진 작은 횟집에선 가끔 고래 고기가 찬으로 올라왔었다. 육고기의 비계처럼 생긴 냄새나는 바다 살코기. 소금에 살짝 찍어 그 맛을 음미하던 어른의 미소. 이어지는 "별미다!" 아이의 입장에서 고래고기는 삭힌 홍어와 다른 점이 없었다. '별미'의 뜻은 오랜 시간 '어른들이나 좋아하는 이상한 음식'으로 정의되었다. 고래와의 첫 만남은 바다가 아니라 바로 식탁이었다. 가끔 뉴스에서 그물에 밍크 고래가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20년 전의 추억을 대강 정리해 보면 바다 생물의 위치는 주로 어판장, 수조, 식탁이었다. 내 의지로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살아있는 고래는 군함을 탈 때 처음 만났다. 견시 업무를 보던 수병들이 돌고래를 발견하면 함내 방송으로 돌고래 등장 소식이 퍼져나가곤 했다. 우리는 함미에 서서 15노트로 달리는 군함을 우습게 따라잡는 돌고래 떼의 군무를 구경했었다. 바다의 비린내와 출항 명령에 진저리가 났지만, 남해에서 돌고래를 만나는 순간만큼은 모든 수병들이 즐거워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오사카를 여행할 때 처음으로 살아있는 고래 상어를 만났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모형으로만 봤던 고래 상어는 10m에 이르는 거대한 수조에 담겨있었는데 압도적인 크기와 등에 수놓아진 아름다운 하얀 점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었다. 지금까지도 포경 산업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이 고래 상어를 보호하고 연구하며 인공 번식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제주도에서 수학여행 가이드를 하면서 바다를 자유롭게 쏘다니는 돌고래를 여러 번 만났다. 돌고래가 등장하면 10초도 집중하기 어려워하는 사춘기 아이들마저 망부석이 되어 바다만 바라본다. 인간은 교감과 학습이 가능한 고지능 동물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경향을 보인다(멸치볶음과 새우젓을 생각해 보면 참 특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울타리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푸바오 가족을 향한 관심과 애정을 보고 있으면 조금 모순적인 관대함 같긴 하다만. 돌고래쇼 공연은 모든 타임이 매진이었다. 돌고래 투어 요트선의 선체와 스쿠류에 부상을 입거나 지느러미에 낚싯줄이 걸린 돌고래가 속출하자 해양수산부가 가이드라인을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군함을 따라오던 돌고래의 까만 눈동자에서는 정해진 리듬이 없는 즉흥적인 즐거움이 느껴졌었다. 뉴스에서 처음 만난 비봉이 눈도 그들과 비슷했다. 때늦게 방류가 결정된 16년 짬밥의 노동자. 어떤 이들은 비봉이가 어린 나이에 잡힌 금등이와 대포의 전철을 밟았다고 주장했다. 바로 방류 후 폐사. 반면에 이미 먼바다로 떠나버려서 추적이 힘들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비봉이를 끝으로 수조에 갇힌 남방 큰 돌고래는 0마리가 되었다. 70일간의 야생 적응 훈련과 6,000일 동안 쉬지 않고 작동한 공연 맞춤용 사고회로. 적절한 등가교환과 시스템 교체가 이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애월 앞바다에서 잡힌 고래 상어는 제주도의 한 수족관에 기증되었지만, 얼마 후 한 마리가 폐사(신부전으로 추정)하고 말았다. 이어지는 비판과 성토 끝에 나머지 한 마리는 방류되었다. 고래 상어를 기증한 어민은 이후 인터뷰에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풀어줄 걸 그랬어요.”라는 말을 남겼다. 수족관에서는 공모전을 통해 해랑과 파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동물에게 붙인 이름은 인간의 죄수번호와 무엇이 달랐을까?
비봉이가 희미해진 기억 너머에 켜켜이 감춰진 자유의 냄새를 발견했길, 그리고 제주도와 인간의 땅에 치가 떨린 나머지 육지가 보이지 않는 원해로 영원히 떠났길 소망한다. 몽매한 로망과 무절제한 결단이 이룬 인류의 행적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자갈치 어판장의 어부들은 벅찬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고기를 잡았지만, 공연과 전시가 목적이었던 제주도의 비봉이와 파랑이는 거센 비난에 불어닥친 다음에야 바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쇼생크 탈출>에서 백발의 노인이 되어 출소한 브룩스가 떠오른다. 어린 돌고래는 중년의 노동자가 되어서 출소했다.
"Call me 비봉" 또는 "파랑 was here". 비봉이와 파랑이는 살아남은 이스마엘이 되었을까, 대들보에 이름을 남긴 브룩스가 되었을까? 나를 이들을 살아남은 마지막 자유어(魚)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