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없는 사람에게 악기는 짐이다. 월세방의 재계약 여부는 불확실했고 늘어난 짐은 이사를 할 때마다 비용으로 처리되니 악기를 집에 들이는 일은 비현실적인 욕심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아기 침대를 포함한 이런저런 가구들이 하나하나 추가되었고 어느새 좁은 원룸이 숨 쉴 틈 없이 꽉 차버렸다. 편히 누울 곳 없는 떠돌이라 하더라도 음악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악기인 카주를 알게 되었고 곧장 인터넷에서 하나 주문했다.
악보나 특별한 주법이 필요 없는 카주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가볍고 작은 취미이자 휴식이 되었다. 태교 연주를 한답시고 종종 아이 엄마의 배를 무대로 삼아 카주를 부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기가 불뚝불뚝 엄마의 뱃가죽을 내리찍었다(?). 태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과학주의로 점철된 MZ세대지만 '효과가 있나? 있네, 있어!'같은 막연한 믿음이 조금 생겼다. 엄마의 배속에서 아기가 헤엄칠 때 작은 신앙이 아빠의 마음속에서 태어났다.
아기가 세상으로 나온 지금도 거의 매일 카주를 불러준다.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카주 소리만 들으면 울음을 뚝 그쳐버린다. 목과 입술 근육을 지탱하는 근육이 힘이 달려 달달 떨려올 때까지 연주를 해도 아기는 나의 입술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기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아기의 눈에서 하트가 쏟아지고 있다고. 아기가 양수와 뱃가죽 너머에서 울리던 공기의 떨림을 기억할리 만무하지만 가끔은 이런 막연한 믿음이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풀뿌리 신앙은 우리의 추억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설명이 불가능한 믿음은 20살이 넘어선 이후부터 꾸준히 거부해 온 타인의 생각이었다. 요즘은 내가 어떤 존재를 향해 막연히 빌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나와 마찬가지로 종교가 없는 아기 엄마는 아기방에 삼신을 모시는 상차림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 작은 소도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