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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육아시 2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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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NJ Apr 04. 2024

이름 없는 비


 1분 동안 사이렌이 울렸고 우리는 안방에서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아기의 문화센터 수업이 끝나자 우리 가족은 차를 몰고 4.3 평화공원을 찾아갔다. 아기는 카시트에서 목이 꺾이는 줄도 모르고 곤히 잠들었고 평화공원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길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있었다. 안내 표지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안개였다.


 기념관은 까마귀와 수학여행을 온 육지 아이들로 가득했다. 젊은 인파로 어수선한 기념관을 뒤로하고 동백나무가 심어진 길을 따라 가볍게 산책을 하다 위령탑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위령탑을 중심으로 이름이 빼곡하게 들어찬 비석이 둘러져있었다. 비석 아래에는 아침 일찍 다녀간 이들이 두고 간 국화꽃과 귤, 간단한 음식들이 놓여있었다. 까마귀들에겐 오늘이 호사스러운 하루였을 것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린 희생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야만 했다. '000의 자' 그리고 '1세'. 4.3 사건은 7년 7개월 동안 섬을 불태웠고, 목적을 잃은 불길은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내며 널리 퍼져나갔다. 오늘은 우리 아기가 태어난 지 7개월이 된 날이다. 아기는 비에 촉촉이 젖은 비석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영원히 늙지 못할 어떤 친구들을 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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