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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NJ May 14. 2024

그림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주방 한편에 작은 작업실을 만들었다. 작업실이라 해봐야 작은 테이블에 이젤 하나가 전부지만 홀로 고민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이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요즘은 주말 수업을 준비하고 남는 시간에 시를 쓰고 새벽까지 커피를 마시면서 그림을 그린다. 성실함이 사라지면 꿈도 산산이 흩어진다. 힘들어도 놓아버리지 않아야 하는 어떤 결이 존재하는 것 같다.


 가족이 없을 때는 버스와 텐트, 그리고 게스트하우스가 집이었다. 언제든 발품을 팔 수 있었고, 온종일 폭포 아래에 누워있을 수 있었다. 거센 파도를 닮은 날것의 에너지가 그림과 글로 곧장 옮겨졌다. 아빠가 된 지금은 설거지 거리가 보이는 주방 구석에 박혀 기억의 책장을 뒤적이고 있다. 어떤 페이지는 벌써 삭아버려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마음이 건조해지면 손에 힘이 들어간다. 무엇이든 자꾸 거칠어졌다.


 마음에 들지 않은 그림을 완성했을 때, 이미 아침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에게 확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보니 내가 제대로 걸어가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글과 그림의 원동력은 언제나 삶이 선사했던 괴로움이었다. 발바닥이 터질 때까지 묵묵히 땅을 보고 걸어야 할 순간이 나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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