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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의 역설

<노르웨의의 숲>과 <구의 증명>

by 조종인
(좌) 무라카미 하루키 - <노르웨이의 숲> / (우) 최진영 - <구의 증명>

<노르웨이의 숲>과 <구의 증명>은 둘 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뒤의 슬픔에 대해 다룬 책이다.

이 책의 인물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자신 몸의 일부를 잃은 것처럼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이곳에서 다루는 사랑은 단순히 우리가 아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그 감정을 가둘 수 없을 정도로 깊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랑도, 죽음도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없어 그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너무 어리다.

하지만 이 감정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감정에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건 왜인지 나도 알 수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과 같은 극적인 사랑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 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中
교통사고와 병과 돈. 그런 것이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나. 성숙한 사람은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는가. 그렇다면 나는 평생 성숙하고 싶지 않다. 나의 죽음이라면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 최진영, <구의 증명> 中


<노르웨이의 숲>과 <구의 증명>에서,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현실도피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죽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죽음에 대한 절망감이 현실마저 집어삼켜버린다. 사회는 아무리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라도, 그것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깊은 감정에서 그렇게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면 오히려 사람이 아니라 감정이 없는 로봇에 가까운 것 아닌가. 현실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성을 버리는 게 아닐까.


죽음은 분명 실존한다. 거짓이 아닌 진실이다. 진실을 진실로써 받아들일수록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 걸 우리는 거짓된 삶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진실을 주장할수록 거짓된 삶을 살게 되는 역설이 생겨난다. 이 역설은 참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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