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들어도 참 답변하기 힘든 질문
'범주화'라는 건 좋기도 하지만 나쁘기도 하다.
범주화를 통해 특정 대상을 쉽게 구분하고 더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너무 쉽게 완결 지어버리는 단점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영화를 "지루한 영화"로 범주화한다면, 그 영화를 다시 보지 않는 한, 그 영화를 그 프레임에서 꺼내기는 힘들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범주화해 달라는 질문과 같게 들린다. 그렇기에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답변하기가 힘들다. 더 좋아할 영화가 많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 가능성을 제한해 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수백 가지는 될 텐데 그 영화들이 모두 똑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를 조금 더 많이 이해시키고 싶고, 스스로도 글을 씀으로 인해 나 자신을 더 잘 알아가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분류를 크게 3가지로 나누어보았다.
보통 <탑건: 매버릭>, <포드 V 페라리>,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오락영화들이 이에 해당된다. 어쩌다 보니 액션 영화 3개를 언급하게 됐는데, 필자 꼭 액션 스릴러가 아니라 <박쥐>, <큐어>와 같이 취향이 갈릴 수 있는 스릴러나 <아비정전>과 같은 사랑 영화도 눈을 떼지 못하고 보았다. 영화를 가볍게 볼 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몰입도'였다. 내가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영화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지가 영화를 평가하는 데 제1의 척도였다. 영화를 많이 보기 시작한 이후로, 이외에도 많은 평가 기준들이 생겼다. 하지만 '볼 때 재미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건 여전하다. 그냥 영화를 보는 시간 동안 온전히 다른 세계 속에 있을 수 있는 게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볼 당시의 재미는 덜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에 계속 생각나는 영화이다. 보통 기준 1)보다 기준 2)에 속하는 영화를 더 높게 평가하는 편이다. 이에 해당하는 영화는 <시>, <세상의 모든 계절>, <데어윌 비 블러드> 등이 있다.
특히 <세상의 모든 계절>은, 영화를 시청하는 내내 너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참으면서 끝까지 본 케이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고 이 영화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을 찾아본 뒤,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이 몇 달이 지나도 끊이지 않았다. 그건 아마 영화 속의 세계가 우리가 직접 살고 있는 세계와도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존재하는 등장인물들이 실제 우리가 사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고, 그 결과 나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단순히 영화 속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세계를 나의 세계로 끌어들여 내 세계를 확장시켜 주는 영화, 그런 영화가 참 좋다.
<투 러버스>, <더 랍스터>, <큐어>, <세상의 모든 계절>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저런 추상적인 말로는 이해가 쉽지 않을 수 있으니 앞서 말한 영화들을 예시로 들어 설명해 보겠다.
<투 러버스>와 <더 랍스터>의 경우, 둘 다 아주 특수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자의 경우 두 여자에게 휘둘리며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남자의 이야기, 후자의 경우 사랑을 강요당하는 특수한 세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특수한 상황을 통해, 우리는 '사랑'이라는 존재의 일반적 특성을 끄집어낼 수 있다. <투 러버스>를 통해서는 '사랑은 주는 만큼 받고 싶어 한다', 는 것. <더 랍스터>에서는 '사랑이 개인의 취향 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면?' 혹은 '사랑에서 중요한 건 사람의 공통점일까? 차이점일까?'와 같은 질문을 통해 사랑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고 그 안에서 일반적인 특성을 끄집어낼 수 있다.
<큐어>와 <세상의 모든 계절>도 비슷하다. 두 영화의 장르는 완전히 다르지만, 둘 다 '쉽사리 치유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추악하거나 탁한 본성'에 대해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역시나 이 영화들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특수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내면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일 것이다. 이런 영화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고, 나아가 나 자신에 탐구 결과를 적용해,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정리해 보았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확정적인 범주화를 꺼리는 편이었는데, 한 글귀를 읽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다.
이처럼 과학은 구체적인 규칙을 만들어서 관찰의 그물망을 통과하는지 알아보는 일종의 게임이다. 한 과학자는 질량이 항상 불변한다'라는 구체적인 규칙을 내놓았고 이 재미있는 가능성은 결국 틀린 것으로 판정되었지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진 않았다. 그저 불확실했을 뿐인데, 불확실하다고 해서 위험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무엇이든 구체적인 주장을 하되 확신을 하지는 않는 편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다.
- 리처드 파인만, <과학이란 무엇인가>, p. 41
내가 구체적인 범주를 정한다고 해서, 그게 어떤 해가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나중에 생각이 바뀌었다면 다시 새로운 범주를 세우면 그만일 테니. 그런 범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나에게 더 가까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