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첩보 액션의 가능성, <휴민트>

<휴민트> 리뷰

by 조종인

*이 글은 <휴민트>의 전개와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류승완이 다시 돌아왔다. 전작 <베테랑 2> 이후 그가 <휴민트>로 복귀하기까지는 2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류승완은 2000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장편 영화감독에 데뷔한 이후, 2~3년 간격으로 쉼 없이 신작을 발표해 왔다. 이렇게 꾸준한 활동을 이어온 그의 앞에, 해결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놓였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자가복제’다. <휴민트>는 그의 14번째 장편 영화다. 이는 곧 그가 이미 열세 편의 장편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대중들에게 충분히 노출해 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의 필모그래피는 대부분 ‘액션’과 ‘느와르’ 장르에 집중되어 있다. 그 결과, 류승완의 스타일은 이제 대중에게 지나치게 익숙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두 번째 과제는 보다 직접적이다. 최근작들의 완성도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다. <베테랑>까지는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지지를 받아왔지만, <군함도>를 기점으로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발표된 <모가디슈>, <밀수>, <베테랑 2>는 ‘작품의 분위기가 너무 가벼워졌다’는 지적에서부터, 연출과 서사 전개 방식 전반에 걸쳐 뚜렷한 호불호를 낳았다. 류승완을 향한 시선이 더 이상 일방적으로 호의적이지 않은 지금, 과연 <휴민트>는 이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 작품일까?



영리한 연출, 순조롭게 진행되는 초반부


<휴민트>의 오프닝 시퀀스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장 피에르 멜빌의 <한밤의 암살자> (원제 : Le Samouraï)를 떠올리게 만드는 구도에서 시작해, 휴민트를 구출하기 위해 벌어지는 타격감 넘치는 액션씬, 그리고 자신의 휴민트가 목숨을 잃게 되면서 죄책감을 갖게 된 주인공 조 과장(조인성)의 상황까지. 오프닝 시퀀스부터 액션을 배치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부터, 그 이후 전개가 자연스럽도록 주인공의 내면을 구하는 부분까지. <휴민트>가 포문을 여는 방식은 상당히 영리하다.


이후 박건(박정민), 채선화(신세경), 황치성(박해준)과 같은 여러 주연들이 등장한다. 이 시점에서도 영화는 아직 흥미진진하다. 감독의 전작 <베를린>과 <휴민트>가 연결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대사로 알려주면서, 전작을 봤던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마음이 들게 만든다. 조인성의 딱딱한 어투, 그리고 박정민과 신세경의 북한말 대사 처리는 완벽하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이들의 대사 처리 방식에 자연스럽게 적응되기 때문에 큰 단점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점차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중반부


극의 중반부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박건과 채선화 사이의 로맨스이다. 하지만 로맨스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이 시점부터 <휴민트>는 본격적으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본작의 장르가 '첩보물'인 만큼, 적당한 수준의 현실성과 개연성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채선화의 정체가 황치성에게 노출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대한민국 정보원들의 공작은 지나치게 허술하다는 인상을 준. 여기에 더해, 로맨스를 부각하기 위해 박건에게 채선화의 고문을 맡기는 설정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황치성은 박건이 채선화에게 조언을 건네는 상황을 목격하고도, 별다른 개입 없이 이를 방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후반부 전개를 고려하면, 박건과 채선화의 감정선은 극에서 필수적인 축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이 파트를 풀어내는 방식이다. 로맨스를 우선시하는 동안 개연성과 현실성이 눈에 띄게 흔들리고, 그 여파는 곧바로 극의 몰입도와 완성도 하락으로 이어진다. 로맨스가 전면에 나서는 동안 액션의 밀도 역시 느슨해지며, 화면의 긴장감마저 함께 풀려버린다.



탄성과 헛웃음을 함께 자아내는 후반부


루즈한 중반부를 지나, 영화는 후반부 액션 시퀀스에 다다른다. 여성들이 갇혀있는 유리관들이 놓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조 과장, 박건, 그리고 마약 브로커들의 총격전은 상당히 흥미롭다. 방탄유리로 되어있는 관을 영리하게 사용한 액션씬은, 상당한 타격감을 보여준 채 쉴 틈 없이 몰아치면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건물에서 나오면서 잠깐 관객들이 숨을 고르는 순간, 황치성과 임대리가 개입하면서 펼쳐지는 액션 또한 뛰어 퀄리티로 선보이면서 결말부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한 액션시퀀스 속 몇몇 컷들은 아쉬움을 남긴다. 조 과장과 박건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에서 동시에 총알이 다 떨어지는 것, 그리고 조 과장, 박건, 황치성이 삼각형 구도로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컷들은 상당히 작위적으로 느껴져 탄성보다는 헛웃음이 새어 나오게 만든다. 분명히 후반부 액션시퀀스는 상당히 공을 들여 제작된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부분 부분 존재하는 옥에 티들을 보고 있자면 그 뒷맛은 썩 개운하지 못하다.


액션 시퀀스가 마무리되며 극은 종결 단계에 접어든다. 채선화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박건은 목숨을 잃는다. 조 과장은 채선화를 한국으로 데려온다는 1차적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채선화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깊은 상처를 입은 채 남겨진다. 여러 국가를 넘나드는 거대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결국 희생되는 것은 개인의 삶이다. 그리고 오프닝 씬을 살짝 변주하여, 조 과장의 방의 불이 꺼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조용히 막을 내린다. 이 엔딩 시퀀스는 관객이 두 인물의 처지에 자연스럽게 공감하도록 이끌며, 짙은 여운을 남긴다.



한국형 첩보 액션의 가능성, 절반의 성공


<휴민트>는 할리우드식 첩보 액션과 멜로의 문법을 한국 영화에 이식하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에서도 완성도 높은 첩보 액션을 기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이 영화는 아직 시원한 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물론 <휴민트>가 거둔 성취를 부정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 액션 시퀀스의 완성도는 분명 인상적이다. 또한 전작 <베를린>에서 제기되었던 북한어 대사의 전달력 문제를 의식한 듯, 이번 작품에서는 관련 대사에 자막을 전면 삽입했다. 류승완 감독이 관객의 피드백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류승완 감독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과제들을 충분히 돌파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과적으로 <휴민트>가 보여준 것은 한국형 첩보 액션의 완성, 혹은 훌륭한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가깝다. 말하자면 절반의 성공이다. 만약 이 작품이 신인 감독의 결과물이었다면 충분한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연출자가 이미 한국에서 오랜 경력을 지닌 감독, 류승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휴민트>에게 마냥 좋은 평가를 내리기에는 망설임이 남는다.


이미지 출처 : TMDB


http://www.cinephile.kr/news/articleView.html?idxno=678

*이 글은 '씨네필매거진'에 먼저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