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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쑤 Nov 03. 2016

웃으면 복이 와요

영국 워킹홀리데이 #4 일자리를 구하다

식상한 제목이다.

누구나 귀에 딱지가 박히도록 들었을 말이다.

그래서 잠깐 고민했지만 이걸 대체할 마땅히 더 좋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이것보다 더 이번 글을 포괄할 수 있는 제목이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제목을 먼저 적었다.


'웃으면 복이 와요'




CV를 돌린 지 한 시간 만에 전화가 왔다.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이 영국 번호로. 잔뜩 긴장을 한 채 전화를 받으니 자기는 방금 네가 CV를 놓고 간 펍의 매니저 Craig라고 소개했다.


그러더니 바로 '내일 인터뷰를 하자'며, 편한 시간이 언제냐고 물어온다. 그렇게 바로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집에 가서 펍에 대한 정보들을 검색해봤다.

가게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보기도 하고, 구글 후기, 트립어드바이저 후기, 온갖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정보란 정보는 다 찾아본 것 같다. 그 뒤에 면접 예상 질문을 세웠고, 알게 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모범 답안들도 생각해놨다. 펍에서 일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많은 펍들 중에 하필 왜 이 곳인지 등.


한참 침대에서 준비해 놓은 대답들을 연습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첫 면접이라 긴장이 됐는지 아침 일찍부터 깼다. 면접은 오후 3시. 밥을 먹고, 준비를 천천히 했는데도 시간이 한참 남아 좀 더 여유를 부리고 있다가, 일찍 집을 나서서 혹시 면접에 떨어질 일에 대비해 소호 근처의 가게를 돌면서 CV를 더 넣고 왔다. 그러다가 3시가 되기 전에 가게로 출발했고, 도착했다.



어제와 똑같은 분위기의 가게. 한적한 낮 시간대, 살짝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그 햇살에 기대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우리나라 술집에서 낮에 이렇게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나 잠깐 생각했다. 바 안에는 어제는 못 봤던 여자 스태프가 하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탈리아 출신의 이 여자애는 Chiara였다. 크래그를 기다리는 동안 마실 거라도 하나 마시겠냐고 해서 오렌지 주스를 하나 받아 마셨다. 칼칼한 목소리의 당차 보이던 모습, 그게 키아라의 첫인상이었다.



곧 크래그가 바 뒤편에서 모습을 보였고, 나를 데리고 지하 바로 내려갔다. 잔뜩 긴장했던 나에게 크래그는 하하 웃으며 긴장 풀라는 말부터 건네줬다.


인터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와 크래그가 나눴던 대화를 인터뷰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날 지하에 있는 테이블로 데려가서 펍 일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그래서 가게에 대해 알게 된 사실 몇 가지가 있다. 가게는 베이스먼트와 그라운드 플로어 이렇게 총 두 층이 있고, 지하에서는 매일 밤 다른 쇼가 열린다. 때로는 코미디쇼, 때로는 퀴즈쇼가 열리고, 행사가 없는 날에는 사설 단체들을 위해 지하를 통째로 빌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지하에 클럽 나이트가 열리는데, 디제이들이 오고 춤을 추러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래서 평소 마감은 12시지만, 금요일과 토요일은 3시까지 가게를 연다. 가게 오픈 시간은 평일 11시로, 펍이다 보니 낮에는 한가한 편이지만 근처 직장에서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많이들 온다. 5시부터는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할 거다. 그리고 가게는 절대 체인점으로 보이지 않겠지만, 사실은 대형 회사 소속의 가게다. 버밍엄에 본사가 있고, 옥스퍼드 서커스 근처에서 봤던 몇몇 가게들도 이름은 다르지만 전부 똑같은 회사 거다. 그냥 쉽게 말해서 다른 가게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키친 멤버들과 바 스태프들, 매니저들을 포함해서 꽤 많은 숫자가 일하고 있다.


짧게 요약한다고 했지만 꽤 길어진 가게에 대한 이 장황한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인터뷰를 가장한 이 대화는 나에게 별 말을 할 기회 조차 주지 않았다. 크래그는 그냥 '마뉴엘에게 얘기 들었다'고 싱긋 웃고 저런 얘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나에게 물었던 것은 굉장히 가벼운 질문들이었다. 가령 '왜 영국에 왔니', '아직 학생이면 전공이 뭐니', '런던에서 어디 어디 가봤니', '혹시 휴가 계획 잡아놓은 건 있니'.


그때 잠깐 키아라가 바 밑으로 내려왔다. 옆에 다른 가게에서 남는 화이트 와인이 있나 물어본다는 것이 용건이었다. 그 때문에 크래그가 잠깐만 기다려달란 말을 남기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까부터 그가 손에 쥐고 있었던 내 이력서가 이제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슬쩍 실눈을 뜨고 바라본 나의 이력서, 그 위에는 두꺼운 매직펜으로 'You should hire her, she has good vibes'라고 적혀 있었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돌아온 크래그와 이야기를 끝내고 바로 다음 날로 트라이얼 약속을 잡았고, 트라이얼을 보러 갔다. 그저 웃는 얼굴로 처음 보는 스태프들과 키아라, 크래그, 일 하고 있던 마누엘에게 인사를 건넸고,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적극적으로 물어보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리고 트라이얼이 끝난 뒤 나는 오피스로 불려 가

'팀에 들어오게 된 걸 환영해, 조'

라는 말을 들었다.





Good vibes


잘 웃는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고등학교 때는 선생님이 '웃음 전형 같은 게 있으면 넌 분명 100% 합격일 텐데' 하는 말을 할 정도로 많이 웃는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난 웃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도 다른 사람이 보면 웃고 있을 때가 많다. 내 입으로 말 하기 조금 우스운 얘기지만 나는 흔히들 말하는 '웃는상'이다.


나중에 이 가게에서 일을 시작하고서야 알게 된 얘기지만, 처음에 바에서 나와 잠깐 대화를 나누었던 스페인에서 온 마누엘이 내 이력서에 'Good vibes'라는 말을 적은 거였다. 런던 1존 중에서도 센트럴, 옥스퍼드 서커스에 위치한 우리 펍은 위치 탓인지 대개 많은 양의 CV가 오피스에 쌓여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추리고 추려 연락을 주고 면접을 보는데, 내가 이력서를 내자마자 전화를 받고 바로 인터뷰 약속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마누엘의 엄청난 지지 덕분이었다. 그는 내 이력서를 오피스에 들고 가서 크래그에게 들이밀며, 'Jo를 뽑아야 한다', 'She is the one'이라고 강력히 어필했다고 한다.



마누엘은 내가 펍에 들어오고 며칠 안 돼서 스페인으로 영영 돌아가버렸다. 난 그의 후임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갑자기 스페인으로 떠나게 되어서 마음이 무거웠다던 마누엘은, 나라면 손님들과도, 가게 스태프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들었다고 한다. 난 마누엘과 잘 알지 못했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그가 나가버렸으니, 심지어 지금도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이렇게나 지지해주었다. 단지 내가 웃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래, 그가 나를 'Good vibes'를 갖고 있다고 말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내가 펍에 들어오면서부터 미소 짓고 있었다는 사실, 단지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런 마누엘의 강력한 입김으로 내가 면접을 보게 됐고, 크래그 역시 나중에서야 나와 그때 간단한 얘기를 나누면서 좋은 기운을 받았다고 말해줬다. 계약서를 적으러 가서 General manger인 Bruce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 날 처음 보고 악수를 건넨 뒤 여럭지 질문들을 우르르 쏟아낸 그는 단번에 'Jo라면 한 식구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해줬다.




사실 이건 사람을 고용하는 데 있어서 이성적 판단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웃는 상이라는 이유, 마누엘이 엄청나게 밀어줬다는 이유를 제외하고도 내가 뽑힌 이유가 더 있을 것이고, 있어야만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웃고 있기' 말고도 나는 인터뷰 때 많은 질문을 받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묻는 말에는 최선을 다해 예의 바르게 대답했고, 준비도 철저히 했었다. 트라이얼 때도 마찬가지로, 모르는 게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무조건 옆에 있는 스태프에게 물어봤고, 누가 무언가를 알려주면 반드시 고맙다는 인사를 덧붙였다. 가게가 바쁘거나 잔이 모자라거나, 플로어가 더럽거나 하면 주조를 하는 데는 내가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 먼저 나서서 뛰어다니며 몸 쓰는 일을 도맡아 했다. 고로 나는 단지 '많이 웃으세요, 그럼 구직이 잘 돼요!'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닌 거다. 하지만 나는 분명 어느 부분에서는 '웃음'이 가져다주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가끔 이것이 발산하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기도 하고,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나는 객관적으로 볼 때 전혀 좋은 구직자가 아니었다. 영어도 스태프들 중에서는 최악이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National Insurance 넘버도 없었으며, 일 중간에 은행 계좌까지 날아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곳에 고용되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건 '웃음'이 가져다주는 기대치도 않은 놀라운 결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페인으로 떠나는 마누엘이 내 CV를 들고 무작정 오피스로 가서 '얘를 뽑으라'고 말한 게 내 구직 성공의 발단이 되었고, 무수히 열악한 조건들 와중에도 이들이 날 보채지 않고 믿어주고 기다려준 것. 이것들이 마누엘 말에 따르면 모두 'Good vibes' 때문이었다고 하니까.





쿵쾅대던 심장을 쓸어내리며 문을 열고 들어간 나의 첫 번째 영국 펍이, 내 영국 첫 일자리가 되었으며, 영국 생활에서 눈에 보이는 첫 한 걸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멤버들과, 그들이 장난스럽게 나에게 '그만 좀 웃어', '뭐가 그렇게 좋아!' 하고 타박까지 하는, 그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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