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쑤 Oct 30. 2016

문을 열고 한 발 들어서기까지

영국 워킹홀리데이 #3 런던에서 이력서 돌리기


마냥 관광하러 온 게 아니다. 난 일을 하러 온 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벌어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보고자 떠나 온 거다.

한국에서 아무리 돈을 벌어 왔다지만 준비해 온 자금은 한정되어 있었고, 런던에서 숨을 쉬고 내뱉을 때마다 숨구멍으로 동전들이 바닥에 딸랑딸랑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얼른 일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이 들고는 했다.


집을 구하기 전 민박에서 묵을 때 하루 숙박비가 30파운드, 당시 한화 약 4만 5천 원. 살 집을 구했지만 역시 하루 작은 침대에 몸을 뉘이고 잠을 청하는 것만으로도 18파운드, 약 2만 4천 원이 나간다.

숙박비도 그렇지만 음식은 또 왜 이리 비싼지. 한 번 외식이라도 할라 치면 10파운드는 기본, 테이크 어웨이 집에서 작은 도시락 하나 먹을라치면 그것도 5파운드 내외.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는 5파운드짜리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양이다.


이러니 집을 구하고서 마냥 행복감에 젖어 있을 여유가 있나.

집을 구하고서 다음 날 바로 한국서 준비해 왔던 CV(이력서를 영국에서는 CV라고 부른다)들을 수정하기 시작한다. 많은 워홀러들이 하는 카페 일은 시급도 좋고 나쁘지 않지만 좀 더 새로운 분야를 도전해보고 싶어 우선순위에서 미뤄둔다. 목표로 했던 건 크게 세 가지 직종의 일이었다.


첫 째, 영화를 좋아하니까 영화관에서 일. 사실 한국에서 런던에서 진행되는 영화제 코디네이터 일을 약 2주 넘게 준비해서 지원했었으나 보기 좋게 떨어졌었다. 그럼 영화관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처럼 거대 기업들 산하의 영화관이 대부분이 아닌, 각자의 매력을 가진 소규모 영화관들이 많은 영국. 영화관에서 일을 하면 영화라는 것 자체에 둘러 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일단 행복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가운데서 영국 영화들에 대해서 많이 접하고 배울 기회가 되지 않을까.


둘째, 리테일 샵. 옷 브랜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많이 없지만, 그냥 옷 사 입는 걸 좋아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사 입지도 못한다. 하지만 예쁜 옷을 고르고, 입었을 때 느껴지는 기분을 난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니 리테일 샵에서 일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했던 막연한 생각.


셋째, 펍이나 바. 술을 좋아한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근처 칵테일 바에서 일하며 칵테일을 만들고, 안주도 가끔 만들고는 했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경력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펍에 지원해 보고 싶은 마음이 진심으로 들기 시작했다.

영국을 느끼려면 펍을 가봐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국인들에게 펍은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장소다. 영국인들 대다수가 단골 펍을 가지고 있을 정도. 영국은 펍마다 간판에 특이한 문양들이 함께하는데, 이는 옛날 문맹률이 높던 시절 특정한 펍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할 때 글을 못 읽어 못 만나는 일이 없도록 펍마다 특징적으로 간판을 만들어 놔서 그렇다고. 그만큼 만남의 장로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게 펍이다. 점심시간 짬을 내어 양복을 입고 펍 앞에 서서 맥주를 마시는 영국인들을 보면 이들에게는 맥주가 그냥 우리가 흔히 일컫는 '술'이 아닌, 유흥 이상으로 일상에 자리 잡고 있는 특별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이런저런 사실들을 알고 보니까 머릿속에 문득 '현지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스며들기에는 펍이 가장 좋은 일자리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걱정도 됐다. 현지인들을 만나는 이 일상의 공간에, 나라는 외부인을 떡 하고 들여보내 줄까 하는 걱정.




첫날 CV를 돌리러 무작정 시내로 나갔다.

시내는 내가 살고 있는 'East Acton' 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약 20분을 달리면 됐다. 런던 1 존도 넓고 다양한 곳이 있겠지만,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지하철 라인이 센트럴 라인이라 환승 없이 직통으로 갈 수 있는 '옥스퍼드 서커스' 역에서 내려 가게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리젠트 스트릿 영화관에 CV를 냈다. 영화관 제출 용으로 CV를 만들어 놨는데, 이 날 깜빡하고 들고 오지 않아 일반 CV를 내버린 게 마음에 걸렸지만, 위풍당당 들어가서 카운터에 앉아 있던 언니에게 매니저에게 CV를 전달해줬으면 한다고 부탁하고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이다음부터. 한가해 보여서 무작정 들어가 CV를 건네주고 올 수 있었던 영화관과는 달리, 많은 옷가게들은 바빠 보였다. 그래서 개 중에 만만해 보이는 베네통과 유니클로에 들어가 똑같이 CV를 주고 왔다. 글로 표현하려고 하니까 'CV를 주고 왔다'로 참 쉽게 표현되는구나 싶다. 하지만 저 간단한 한 문장을 실행하기까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사지도 않을 옷들을 뒤적이며 매장을 서성이고, 점원들이 어떤가도 슬쩍슬쩍 살펴보고, 바쁘지 않아 보일 때 재빨리 계산대 앞으로 가 '일자리 구하고 있는데, 혹시 사람 뽑고 있나요?'하고 물어본다. 이런 과정도 순조롭지 않다. 영국 각지에서, 유럽에서, 아니 넓게는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런던에 나 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 분명한데 새삼 왜 이리 떨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평소에 세심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소심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이제껏 해오지 않았던 일에 첫 발을 내딛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서성이며 헤매다 펍 몇 군데를 발견했다. 그중 한 곳의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CV를 줄 요량으로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바 안에 두 명이 일하고 있고, 가게는 꽤 한적해 보였다.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 몇 명이 가게 테이블에 자리 잡고 잡지를, 신문을, 노트북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몇 명은 또 바 앞에 서서 시끌시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어떤 가게보다 이 곳에 들어가는 것이 나에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앞서 말했던 영국 펍에 대한 생각이 괜스레 깊게 자리했나 보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앞서 갔던 관광객들이 넘치던 옷가게들과는 달리, 진짜 '영국'이라는 영역에 발을 딛게 될 것 같은 느낌. 가슴 뛰며 벅차면서도, 그 벅참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한 가득. 그렇게 가게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 결국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언제나 알고 있는 건데 동시에 잊고 지내는 것 하나가 있다.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땐, 처음에만 좀 힘들다는 것. 앞서 말한 것처럼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것. 그 새로움이 어느새 내 것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 펍에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부터 그랬다. 큰 덩치의 서글서글한 바 스태프가 날 보고 '헬로!' 하자마자 긴장이 풀리며 배시시 웃음이 나왔고, '혹시 여기 사람 뽑아요?' 하며 CV를 내밀었다. 펍 문 앞에서 두근거리던 가슴을 쓸어내리던 것도 잠시, 나는 스태프들과 이런저런 사소한 얘기들을 나눈 뒤 매니저에게 CV를 전달해줄 것을 당부한 뒤 펍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가게를 나온 뒤 잠시 옥스퍼드 스트릿을 더 거닐었다.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방향이 어딘지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이 날 이력서를 돌리며 어찌 됐든 어디론가 나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다른 가게들에 이력서를 넣으러 가는 건 오늘보다는 조금 더 쉽겠지. 오늘은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내일은 오늘 디딘 이 한 걸음이 추진력이 되어 좀 더 한 발짝 쉽게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런던의 한 중심에서 그렇게 뚜벅뚜벅 걷고 있는데 지잉-하고 가방 안에서 크게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국 번호는 정지해서 영국에 왔으니, 아는 사람도 없는 이 영국 번호로 갑자기 전화가 온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런던에서 집 구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