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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혁 Oct 23. 2024

뭉친 어깨

막다른 골목에 서서 힘들어하는 내 글쓰기에 대한 작은 변명과 다짐

그런 날이 있다. 유달리 일찍 잠이 들어버려서 절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던 시간에 눈을 떴는데 피곤함이 몰려오지 않은.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하는 양치를 마치고, 새벽감성 가득한 독서를 하자며 책을 집어 들었다. 일단, 쾌적한 독서환경을 만들자며, 활자를 읽기 좋은 배경음악을 골랐다. 굳이 익숙하고 편한 음을 찾자고 오랜만에 앨범들을 뒤적거리며 슈베르트를 ‘굳이’ 찾아내었다.   

   

그러고는 에세이집 한 권을 폈다. 일상 속에서 매일 쓰는 차가운 숫자들과 정형화되어 때때로 싫증 나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를 때가 왕왕 있는 보고서의 홍수 속에서 문장력을 잃었다고 한탄 섞인 핑계를 대면서 글쓰기는 놓고 살았다. 그래서 문학적(?)인 감수성을 채워야 한다고 잔뜩 쌓아둔 소설과 에세이집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갑자기 짧은 에세이 한 편을 읽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비겁한 변명에 대한 자기반성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인가 어깨가 뭉치기 시작했었다. 쓰기를 좋아했던 내가 쓰지를 않고 있었다. 잘 썼다고 느껴진 글에서 사람들이 강박과 뻣뻣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느낌을 피하고 싶어 가끔씩 주위사람들에게 글을 보내고 피드백을 받곤 했다. 그때마다 A형은 힘을 빼라는 말을 자주 전한다. 짧은 기자 생활과 긴 의류업을 해온 A형의 문장은 대상 속에서 대상의 특징과 재미를 끄집어낸다. 그런 A형 문장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형과도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문장을 보면서 또 한 번 나는 그걸 부러워하고 있다. 그런 형이 내게 보내주는 피드백에 새침하게 매번 알겠다고 답하기는 하지만, 머리로만 이해가 되었는지 여전히 내 글에는 뻣뻣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다른 한 편으로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친동생에 피드백을 요청한다. 그가 내게 주는 피드백은 칭찬으로 시작되는데, 그 칭찬은 일단 나를 꽤 업되게 하는 편이다. 내 입장에서는 업자(?)가 들려주는 피드백의 시작이 칭찬이라고 말이다. 다음으로 들려오는 세세한 피드백 중 자주 오는 내용은 그 안에서도 뭔가 정보를 항상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피드백을 듣고 동생이 예전에 보내주었던 습작들을 열어보았다. 동생은 전공을 해서 그런 것인지 역시 업자라 그런 것인지 문장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르다. 글이라는 요리의 과정에서 문장이라는 실력이 예리하고 섬세하다. 글 자체가 주는 순수한 매력,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필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역시 업자는 남달랐다.     


오늘 아침 집어든 에세이에서도 그걸 느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 그것들은 모두 작가의 일상 속에 스며든 것들이었다. ‘글을 쓰고 나누는 일상’을 보내는 작가의 솔직한 삶의 단면이 깊은 고민과 사색 속에서 풀어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온전한 자신의 삶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는 그 모습 자체. 내 글은 그런 솔직함이 있었나.    


A형의 글을 읽으면서, 동생의 습작들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어 내려가던 에세이들을 보면서 나는 내 글을 또 재고 있었다. 남들을 홀릴만한 매끈한 문장이 없다면 내 글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하면서 말이다. 변명하자면 항상 그런 일상에 젖어있다. 시장에서 살아남고, 더 많은 부를 이룩하고, 타 지역에 비해서 좋은 사업을 따오거나 기획하려면 내 경쟁력은 무엇인가를 되뇌고 안 되는 말과 논리를 지어내면서 살고 있다. 심지어는 연애사업의 속에서도 내 경쟁력을 묻고 앉아있었지. 혹자는 말할 것이다. 그것이 주는 좋은 점도 있을 거라고.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그런데, 항상 그럴 필요가 있을까. 물론, 다듬고 이쁘게 만들고, 분석하고 경쟁하는 게 항상 나쁜 건 아니다. 그게 요구될 상황도 있을 터이다. 그런데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솔직함에서 출발하는 것 아닐까. 누군가에게 보이는데 너무 힘쓰다 보니까. 그래서 완벽한 경쟁력이 준비될 때를 기다리니까 그러니까 키보드에 손 하나 얻지 못하는 것이다. 문뜩 글쓰기에 관한 글들을 찾아보다 22년 한겨례21에 기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주인이 궁금해지는 '힘 뺀' 글쓰기"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몸에 힘을 빼야 합니다. 젠체하며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은 가급적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글에도 그런 게 다 담깁니다. 이런 글은 내용이나 표현이 하나같이 진부하고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겨례21 "주인이 궁금해지는 '힘 뺀' 글쓰기" (2022.10.30)-


어느 순간부터 젠체하면서 "나 글 좀 써"라고 사람들한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잘난 척을 보면서 재수 없어하면서, 노잼이라고 놀리곤 했다. 그런데 그 노잼이 어느 순간의 나는 아니었을까. 잘 써야 한다는 강박, 누군가와는 다른 매력을 찾다 보니, 어느 순간 어깨가 뭉쳤다. 뜻하지 않게 만난 새벽녘의 문장들이 갑자기 뭉친 어깨에 대한 처방을 보내주었다. 아마, 쉽게 뭉친 어깨를 풀 수 있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병을 알고 모르는 것에 대한 차이는 클 거 같다. 힘을 풀라는 말을 머리로 이해하다가, 손 끝에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은 더 자주 브런치에 로그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해지는 연습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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