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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May 31. 2020

인센티브가 만드는 정의로운 세상

정의기억연대 회계 논란

1. 활동의 추억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회계 관련 의혹을 보며 예전에 잠시 활동했던 한 단체가 떠올랐다. 주말에만 모여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을 하는 단체였다. 내 딴엔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해 작은 보상에도 꽤나 많은 시간을 쏟았었다.


 이 단체의 대표가 회계부정 의혹에 휩싸였었다. 국가에서 보조금을 지원받는 과정에 중복이 있었고 후원금을 본인계좌와 지인계좌로 모집했다. 회계사를 불러 매 분기 수입과 지출을 맞췄지만 세부사항엔 누락이 많았다.

 대표는 본업이 있으면서도 왕성한 활동력으로 오랫동안 이 단체를 성공적으로 운영해온 분이다. 나도 여러 활동을 같이 하며 이 분의 능력과 태도, 열정에 경탄했던 터라 회계 부정 의혹이 제기됐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소속 활동가들은 양극단으로 대립했다. 특별한 비리가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회계처리가 불투명했을 뿐이라고, 본업도 있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철저히 하느냐고 두둔하는 무리가 절반 정도 되었다.

 나머지 절반은 실제 비리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냐며, 보조금과 후원금으로 운영하는데 회계 관리가 미진한 것 자체가 큰 문제라며 대표가 책임져야 한다고 맞섰다. 대표가 후원금을 횡령해 집을 샀다느니 자녀 학비를 댔다느니 하는 소문도 뒤에서 돌았다.


 대표의 업무처리에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이 또 다른 의혹을 제기하며 사안이 점점 커졌다. 매주 활동이 끝나고 회의를 하면 감정이 격해지고 고성이 오갔다.


 대표께선 왜인지 나에게 수습의 역할을 맡기셨다. 내가 단체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그나마 중립적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분께 비교적 우호적이어서 유리한 방향으로 수습을 해주길 원했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한 달여를 매달려 활동가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검증의 절차와 규율을 만들었다. 실제 검증과정에서 명백한 비리의 혐의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묵과할 수 없는 회계 관리 부실과 기타 여러 문제가 발견됐다. 대표는 결국 자진해서 사임했고 그 이후로도 관련된 일은 더이상 하지 못했다. 내 손으로 존경하는 분을 내쫓은 셈이 되었다.


 이분이 그만두실 때 적폐를 청산했다거나 정의를 구현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헌신적이고 유능한 한 사람의 활동가를 잃었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회계 관리는 투명하게 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수년간 수고해온 이분의 불명예스러운 퇴장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나는 이분이 아무 잘못이 없다고 감싸고 돌만큼 뻔뻔하지도 못했다. 이분이 높은 윤리의식을 가지고 모금한 돈을 전부 공익을 위해 사용했을 수도 있지만, 자금유용과 횡령을 막기 위해 마련된 제도적 장치를 무시한 죗값은 응당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쥐 같은 나는 이분의 허물을 들춰내면서도 괴로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2. 데자뷔


 윤미향 의원을 향해 제기되는 의혹을 보며 이때가 떠올랐다. 부실한 장부기입, 개인계좌로 모금 활동, 딸 유학과 부동산 취득 관련 횡령 혐의 등등 항목이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나 싶다.


 처음엔 의혹의 수준이 얼토당토않아서 관심을 끊었었는데 생각보다 오래가는 언론의 공세에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회계 관련된 굵직한 것만 추려내도 1) 수입 및 지출 세부내역을 장부에 정확하게 기입/공시하지 않은 점, 2) 윤미향 개인계좌로 모금, 3) 안성 쉼터 고가매입/헐값매각, 4) 부동산 취득 대금 및 자녀 학비 출처 불분명, 5) 아버지가 시설물 관리, 6) 남편 운영 업체에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다양하다. 1)은 수입과 지출내용에서 누락된 항목이 꽤 많다.


 이중 몇 가지는 정의연과 윤미향 의원이 직접 인정하고 사과했다. 수입 및 지출 내역의 공시 누락과 개인계좌 모금은 회계 관리가 부실/불투명했던 부분으로 인정했다. 안성 쉼터의 관리자로 아버지를 지정한 것 역시 사려 깊지 못했다고 인정하고 사과했다. 안성 쉼터 매매는 기부금을 부적절하게 운용해 재산상 손해를 끼쳤기 때문에 업무상 배임의 혐의가 있다. 남편 언론사 관련도 입찰에 참여한 업체 중 가장 낮은 비용을 제시했다고 해명했으나 입찰 시기가 맞지 않고 결과적으로 가족이 운영하는 업체를 선정한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


 하지만 위 사안들은 재정 관리가 철저하지 않았을 뿐 대단한 비리나 부정축재의 예로 볼 수는 없다. 아버지나 남편이 정의연 업무를 맡았다 해도 임금수준이 노동에 대한 대가로 적정했다면 부당한 이득을 취한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수익금과 기부금 내역을 고의로 누락, 횡령하여 부동산을 취득하거나 자녀 유학자금으로 사용했을 때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직접증거도 제시된 게 없다. 윤 의원의 해명에 시기와 금액이 잘 안 맞는 부분이 있지만, 앞서 회계 관리가 미진했던 점을 고려하면 기본적으로 돈에 대해 철저함이 없어서 그렇지 고의로 속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개연성이 약한 정황 증거만으로 모든 의혹이 사실인 양 몰아가는 사람들의 얄팍함은 그닥 새롭지도 않다.


 내가 이번 의혹을 보며 예전 기억을 떠올린 이유이다. 적은 보상에도 홀로 분투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하지만 모든 부분에 역량이 뛰어난 것은 아니며, 회계 등에 전문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일 처리에 부족함이 있었다. 그 가운데 절차를 무시하기도 하고 적도 만들었다. 어느 순간 과거가 화살이 되어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혔다.


 이번 사안에 대한 내 심정 역시 예전과 비슷하다. 과거에 부실했던 부분도 현재의 엄격한 기준에 맞춰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관행이나 일손의 부족은 핑곗거리가 되지 않는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그게 정의구현이나 적폐 청산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활동가 한 사람을 잃어야 한다는 안타까움이 더 크다. 지원도 못 해줬으면서 평가는 엄격했던 데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3. 인센티브가 만드는 정의로운 세상


 하지만 가장 큰 두려움은 윤미향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정의롭다 여기는 가치를 위해 싸워온 수많은 활동가들이 느낄 좌절감과 압박감이 가장 우려스럽다. 회의를 거듭하며 그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이다. 박봉에, 격무에, 부정적인 시선에, 가정불화에 시달리고, 때론 부업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도, 욕망을 따르지 않고 내면에서 혁명을 이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 아버지도 공익재단에서 일하신다. 아버지야 기업에서 오래 계시다가 은퇴하셔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시지만 고용된 수십 명의 직원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으면 가는 게 당연하다. 재단에서 일하고 싶어서 나에게 물어보는 선후배들이 있는데, 나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추천하지 못한다. 잠깐은 경험 삼아 하겠지만 평생을 매달리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단체의 조직관리에 미진함이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회계 관리를 철저히 할 정도로 고급트레이닝을 받은 사람이 월급 200만 원도 못 받으며 시민단체에 남아있으려 할까? 인사관리 전문가가 집 한 채 못 사고 자녀교육도 포기해야 하는 자리에 쉽게 갈 수 있을까? 대외홍보에 유능한 인재가 부모 용돈도 제대로 못 챙기는 활동가의 일을 맡으려 할 리가 없다.


 스스로 느끼는 보람과 외부의 인정이 낮은 경제적 보상을 대체해줘야 하는데, 약간의 틈만 보이면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이 사회에서 누가 공익활동을 하겠다고 선뜻 나설 수 있을까. 정의감은 있으나 물욕은 없어야 하고, 부모 자식 다 내팽개치고 거지 같은 집에 살아야 하지만 또 실력이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활동가를 요구하는 이 세태에 남아 있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심히 걱정이다.


 사실 난 이분들이 더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식 교육도 번듯하게 하고 부모 용돈도 적잖게 챙길 수 있는 수준의 월급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성적으로가 아니라 제도적으로, 이들이 만들어내는 가치만큼 충분한 보상이 돌아가는 체계가 구출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는 사업에 경제적 인센티브를 줄 수 없다면, 적어도 물질적 손해를 상쇄할 만한 인정과 존경이 이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들의 허물이 우리의 허물이라고 생각하고 용납해야 하며, 개선의 과정 역시 같이 감당해줘야 한다. 내가 못 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 아닌가.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시민단체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금욕과 역량을 동시에 요구하면, 정작 실력 있는 사람들은 정의로운 일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된다.


 그럼 이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당연히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실력 있는 사람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곳 중 하나가 수구언론들이다. 수구언론의 패악질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정의연의 활동을 폄훼하기 위해 별 간사한 수를 다 쓰는 걸 보고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도구를 사용하고 늘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는 프로페셔널들이다.


 지원 대상자와 활동가 사이의 벌어진 틈을 기민하게 파고든다. 부동산과 자녀 교육 등 대중이 관심 가질 만한 사안을 포착한 후 사실과 왜곡, 과장과 누락을 활용하여서 한 인간을 폐기물로 보이게 한다. 느슨한 개연성을 마치 확실한 증거인 양 포장하고, 착각에서 비롯된 해명의 오류를 고의적 기만으로 탈바꿈시킨다. 이게 반복되면 없는 사실도 있는 양 믿게 된다.


 이들이 특별히 악랄하다고 생각하는 건 이제 단념했다. 이 사람들은 그저 자기 일을 할 뿐이다. 그리고 자기 일을 잘 할 뿐이다. 이들이 더 프로페셔널의 면모를 갖춘 것은 그들이 실력에 합당한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수구매체들의 연봉은 진보매체보다 더 높고, 언론사의 연봉은 시민단체보다 훨씬 더 높다.


 실체가 모호한 '인간의 선함'에 기댄 활동에는 한계가 있다. 중요한 일일수록 더 큰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 정의를 요구하기 이전에 정의로운 활동에 충분한 지원을 해줘야한다. 그다음에야 투명한 회계 관리니 효율적 조직 운영이니 요구하는 게 맞다. '착한' 활동을 요구해서는 '착한' 세상을 만들 수 없다.



4. 박쥐


 박쥐 같은 나는 정의연의 회계부실에 대한 양극단의 주장에 모두 공감하는 동시에 모두 반발한다. 시대에 발맞춰 구시대의 관행은 타파해야 하며 국고보조금과 시민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시민단체는 특별히 더 높은 투명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이 처한 열악한 근무환경을 고려해야 하며 회계 관리 부실을 근거로 활동 자체의 가치를 폄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윤 의원과 정의연에 아무 잘못이 없다고 감싸고 돌만큼 뻔뻔하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열악한 환경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온 이들에게 쉽게 손가락질할 만큼 모질지도 않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가치 있다 여기는 일을 나 대신 해준 이들에게 금욕까지 요구할 만큼 염치없지도 않다.


 윤미향 의원의 거취와 상관없이, 그와 정의연이 해온 활동들이 방향을 잘 잡아 지속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스스로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싸워나가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이 일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바람을 담은 나만의 작은 실천으로서, 글을 남기는 동시에, 정의연에 얼마간 후원금을 보내기로 했다.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활동을 한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작은 후원금이 모여 의미 있는 열매를 맺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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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사실 회계 문제보단 정의연 운동 자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공론화된 것이 긍정적이라면 긍정적인 부분이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이 제국의 횡포에 억압받은 식민지 시민을, 국가의 동원에 억압받은 개인을, 남성의 폭력에 억압받은 여성을 위한 인권 운동으로, 전쟁의 광기가 반복되지 않게 막는 평화 운동으로 지속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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