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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Jun 27. 2020

"천한 것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천국

인천국제공항공사 이슈로 보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명암

    1. 천국과 지옥


남아공의 석양


남아공 있을 때 스웨덴에서 온 방문교수와 같은 연구실을 썼다. 한번은 이 분이 자기 집에 초대해주셨다. 방이 네댓 개 되고 위층에 석양이 보이는 예쁜 테라스가 있는 2층 집이었다. 테라스에 설치된 그릴에 바비큐를 해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둘 다 타지에서 온 지라 자연스럽게 남아공 생활이 어떤지 나누게 되었다. 이 교수님은 우리에게 지상천국쯤으로 비치는(요새는 아니다만...) 스웨덴에서 왔으니 당연히 남아공에 불만이 많지 않을까 짐작했다.


하지만 이 분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남아공 생활이 너무 만족스럽단 것이다. 스웨덴 자택에 비해 훨씬 넓은 집에 살며 주말마다 와인농장에 딸린 고급 레스토랑서 외식을 하고 여행도 더 자주 다닐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남아공 오면서 사모님이 일을 쉬게 되어 수입이 줄었는데도 오히려 삶의 질이 더 높아졌단다.


나도 스웨덴과 환경이 비슷한 영국에서 오래 지낸 터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소득 수준이 높아도 중산층의 삶 빈곤층 크게 다르지 않다. 인건비와 임대료가 높아 외식 등 서비스업을 이용하는데 부담이 있고, 집값 역시 비싸 웬만큼 부유하지 않은 이상 집이 다 고만고만하다.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모기지 이자 갚고 생활비 쓰고 하면 남아공에서만큼 호화롭게 살기 어려운 환경이다.


다른 한편으론 교육 수준이 낮던지 해서 좋은 직장을 못 얻더라도 삶의 질이 아주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교적 높은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무상의료/무상교육/주거급여/실업수당 등 각족 복지가 잘 되어 있으며, 장바구니 물가가 안정돼 있어 괜찮은 식자재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반면 남아공은 중산층과 빈층 사이 생활격차가 굉장히 크다. 제일 결정적인 것은 낮은 인건비이다. 인건비가 낮으니 서비스업 물가가 전체적으로 낮다. 외식도 저렴하고, 청소나 요리, 정원관리도 사람을 써서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소득만 있으면 꽤 호화롭게 살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부부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하려면 영국에선 최소 15만 원은 줘야 했는데 남아공에선 3-4만 원이면 충분하다. 가사도우미를 반나절 고용하면 영국은 5만 원 정도라면 남아공은 만원도 채 안 든다. 선진국에서 벌어서 남아공에서 쓸 수 있다면 여기야말로 지상천국이다(약간 위험한 천국). 유럽의 은퇴한 연금생활자들이 남아공에 많이 오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하지만 이 천국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눈물 위에 세워져 있다. 낮은 인건비는 곧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적음을 의미한다. 남아공의 최저시급은 20랜드(1400원), 월급으로 환산하면 25만 원 정도이다. 그나마도 안 지켜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턱없이 부족한 임금에 약간의 정부 보조금을 더해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공공서비스도 미비해서 빈곤층은 제대로 된 교육이나 진료를 받을 수 없다.


내가 선택받은 계층에 속했다면 남아공은 영국이나 스웨덴에 비해 훨씬 좋은 나라다. 단, 선택받지 못했다면 남아공은 그야말로 헬(hell)이다. 그리고 이 헬이 더 끔찍해질수록 천국의 삶은 더 윤택해진다. 가진 자는 자신의 풍요를 지키기 위해 "천한 것들"의 삶의 개선을 허락하지 않는다. 실제 남아공에 전국적인 최저임금법이 도입된 지 불과 2년이 안됐는데, 최저시급을 1400원으로 정하면서도 재계는 "시장논리"를 동원해 심하게 저항했다.



2. "천한 것들"의 노동


이게 흔히 말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문제다. 아공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역시 비정규직의 처우와 근무환경이 오랜 사회문제가 되어 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나뉜다. 2018년 기준 전체 노동자의 10퍼센트만 1차 노동시장(대기업 정규직)에 속했는데 이들은 2차 노동시장(대기업 비정규직 및 중소기업 정규, 비정규직)에 속한 노동자에 비해 1.7배 높은 임금을 받으며 같은 직장에 2.3배 더 오래 근무했다. 2차 노동시장 중 제일 열악한 중소기업 비정규직 임금은 대기업 정규직의 35%, 근속연수는 28%에 불과했다.


https://www.donga.com/news/Economy/article/all/20190903/97239742/1

사용자는 경영효율화, 노동유연화, 자유시장경제 등의 논리로 값싼 노동을 정당화한다. 말하자면 비정규직은 대체 가능한 존재이다. 특별한 자격이나 숙련도를 필요로 하지 않아 늘 수요(일자리) 보다 공급(구직자)이 더 많다. 기업 입장에서는 높은 임금을 주거나 고용안정을 보장할 이유가 없다. <임계장 이야기>에서 말하듯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노동자들이다.


 싸구려 노동의 존재는 선택받은 자들의 사회를 윤택하게 하는데 일조한다. 마트 캐셔의 낮은 봉급은 장바구니 물가를 안정시킨다. 식당 웨이터의 잦은 교체는 외식비를 절감시킨다. 아파트 경비원의 시간 외 근무는 관리비 부담을 경감시킨다. 이들의 임금이 올라가고 고용안정성이 보장되면 사회가 감당하는 비용 역시 커진다. 비정규직의 열악한 근무환경이 소개되면 모두 눈물은 훔치지만,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들의 삶을 개선해주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진 잘 모르겠다.


오히려 이 사회는 "귀한 분들"과 "천한 것들"을 끊임없이 분리하여 좋은 일자리는 더 좋게, 나쁜 일자리는 더 나쁘게 만든다. 허구에 불과한 "능력주의"를 빌미로 성공한 사람들의 보상을 정당화하는 한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업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로 폄하한다. 더 위험하고, 더 고강도이고, 더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성과는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커서 저렇게 된다"는 말로 간단히 부정한다. 이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보상 역시 "공정하지 않다"며 거부당한다.


천한 것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사회 천한 것들의 삶의 개선을 원하지 않는다. 선택받은 자들의 천국을 만들려 지옥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왜 모를까.



3. 더 나은 사회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 정규 전환을 앞두고 여기저기 불만이 터져 나온다. 공정하지 않다느니 형평성에 어긋난다느니 심지어 사회주의니 말이 많지만(개중 들을만한 의견도 있고), 나는 더 근본에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재능이든, 노력이든, 운이든, 태생이든, 어떤 이유로든 선택받은 소수에 속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행복을 누리는 사회가 과연 발전한 사회인?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더 나은 사회는 "천한 것들"의 눈물 위에 지어진 가진 자들의 천국인가?


어떤 노력을 어떻게 보상할지 논의하는 데엔 정교함이 필요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치고 "공정한 경쟁"을 빌미로 비정규직의 낮은 보상을 정당화하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완화하기 위해 공기업, 공공기관부터 솔선하는 게 얼마나 불공정하며 얼마나 사회주의적인지도 잘 모르겠다. 모든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하는 가치만큼 대우받는 게 진짜 공정한, 진짜 자유로운 사회가 아닐까 싶다.

 

내가 만났던 스웨덴 교수님은, 자기의 주관적 만족도와 별개로, 남아공이 스웨덴보다 더 나은 사회라고 생각했을까?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가진 자들이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모두가 잘 사는 사회일까 아니면 소수가 희생하더라도 일부만 잘 살면 되는 사회일까.


나에겐 답이 명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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