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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Sep 14. 2020

소멸되는 개인을 위한 애도

그 어떤 대의명분도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없다


저는 감정에 서툽니다. 마음에 어떤 감정이 일 때 그게 정확히 무슨 감정인지,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요 며칠 추미애 장관 아들 문제를 놓고 저에게 든 감정 역시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여당 인사들의 의혹에 짜증이 났습니다. 논리도, 근거도, 팩트체크도 없는 야당과 언론의 무리한 공세에 화가 났습니다. 반대세력의 공격만큼이나 질이 낮은 지지세력의 변호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실망감과 비통함이 있었습니다. 여당이라고 더 기대한 것도 아니고, 언론과 야당은 평소와 다를 바 없으며, 여당의원이든 지지자들이든 다 자기 위치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마음쓸 이유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어제 하루간 찬찬히 제 마음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감정이 무엇인지,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

대부분의 경우 트리거는 부정확한 정보의 유통입니다. 프레임 안에 갇힌 과장과 왜곡과 거짓은 그 자체로 저에게 불쾌한 감정을 일으킵니다. 연구자로서 팩트체크와 맥락에 맞는 근거 사용과 확증편향의 제거를 연습하면서 생긴 습관 탓입니다.

하지만 이 불쾌감이 바로 좌절로 연결된 것은 아닙니다. 지난 며칠, 그리고 비슷한 사건이 반복될 때마다 제가 느낀 감정은, 거짓과 과장과 왜곡에 의해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과정을 목격하며 생긴 비통함이었습니다. 허울뿐인 대의명분과 진영의 이익과 조직의 보위를 위해 지워져 버린 '개인'에 대한 감정이입이 저를 그토록 힘들게 하였습니다.

이번 이슈에서 최초로 지워진 개인은 추미애 장관의 아들입니다. 모든 맥락이 소거된 채 특혜의 시비가 붙고 개인의 사생활이 까발려집니다. 군 시절 있었던 개인적인 일화와 대화들이 저마다의 색안경으로 각색된 채 유통됩니다. 어디서 유학했고 어디서 일하는지 모두 노출됩니다. 의혹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형벌의 무게가 과오를 뛰어넘습니다. 상대편의 지지율을 낮추기 위해서라면 개인의 삶은 파괴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가혹한 행위는 "민주주의"나 "정권 견제"라는 우아한 대의로 포장됩니다.

두 번째로 지워진 개인은 제보자로 나선 당직사병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진술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를 자기 입맛에 따라 소비합니다. 야당의원들은 그의 증언을 선택적으로 활용합니다. 언론은 그의 증언을 자극적인 단어로 포장합니다. 또한 반대 측에선 진술의 신빙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맥락을 제거하고 그를 거짓말쟁이로 만듭니다. 그에게 적대적인 지인이 제공한 성격 증거를 검증 없이 받아들여 제보자를 일베와 극우로 몰아갑니다. 한편에선 그를 '용기 있는 공익제보자'로 추켜세우고 다른 한편에선 그를 '배후조종당한 오염된 증인'으로 낙인찍습니다. 어느쪽도 이 개인의 인격과 존엄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개인들이 소멸됩니다. 함께 복무한 병사들과 장교들, 추 장관의 가족과 보좌진들, 제각각 다른 경험을 가진 수많은 군필자들이 장기판의 말처럼 이리저리 사용됩니다. "정권 견제"와 "공정", "검찰개혁"과 "언론 개혁" 등 실체와 목적을 알 수 없는 단어들의 향연 아래 개인의 생각과 행동의 맥락은 증발해버립니다. 대중은 그들을 쓰다버린 부속품처럼 금세 잊겠지만, 그들은 이 갈등의 후폭풍을 상당기간 온몸으로 받아내어야 합니다.

...

지난 며칠 저를 괴롭힌 이 감정의 정체는 '소멸되는 개인'을 향한 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감정은 지난 1년 간 시시때때로 저를 괴롭혀 왔습니다. 조국 전 장관의 가족이 언론과 검찰과 야당에 의해 난도질당했습니다. 정의연 활동가들과 '위안부' 피해자들이 상반된 진영의 입맛에 맞게 이용당했습니다. 서울시장과 그의 성추행 피해 여성이 정쟁의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내상을 입었습니다. 소멸되는 개인들을 위해 작게 소리를 질렀지만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래 존경해온 사람들조차도 본인이 신봉하는 대의명분을 위해 '개인의 존엄'을 훼손하는 모습을 보일 때 저의 상처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간 제가 진영을 가리지 않고 비판해왔기 때문에 '양비론자'거나 '기계적 중립성'을 유지하는 비겁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저에게 특정한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편'의 행태에 동일하게 화가 나는지 스스로 납득이 잘 안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저는 함께 소리질러 줄 동지가 없는 개인의 편에 서기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선택해 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 신념이 뿌리내리고 있는 가치는 어떤 대단한 대의명분이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우선해서 지켜져야 하는 것은 '개인의 존엄'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인간은 누구나 소중하다, 누구나 스스로 원하는 형태의 삶과 생각을 영위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삶은 온전히 그 사람의 것으로 이해받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우리의 존엄을 설명합니다.

검찰개혁도, 언론개혁도, 불평등 해소도, 민주주의도, 정권 견제도, 모두 다 개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그 어떤 미사여구를 가져다 쓰더라도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대의명분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으며, 저는 그 가운데 희생당하는 개인을 위해 목소리를 낼 의무감을 느낍니다.

...

요 며칠 느낀 분노와, 짜증과, 슬픔과, 실망감으로 인해 세상 돌아가는 소식 더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소리 내봤자 변하는 건 없고 내 상처만 깊어지니 글도 그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단한 일을 해낼 순 없지만 소멸되는 개인들을 위해 함께 울어줄 수는 있습니다. 정치문제로, 경제문제로, 코로나로, 차별로, 환경파괴로 사라져 가는 개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애도하는 것은 비교적 처지가 괜찮은 저 같은 사람의 책무입니다.

그리고 이는 언젠가 저의 존엄이 위협받을 때 함께 울어줄 사람을 찾는 도움요청이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연대가 필요한 사람들의 편에 서면 그때 내편에 설 사람이 더 많아질 거라는 순진한 기대를 아직은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앞장서서 싸우지도 못하면서 쉽게 외면하지도 못하는, 그래서 글이라도 남기는 걸로 부끄러움을 지우려하는, 저의 비겁한 글쓰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습니다. 소멸되는 개인을 위해 우는 것을 당분간 멈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에 반응해주신 분들께는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혹시라도 저의 글이 누군가의 존엄을 위협한다면 언제라도 따끔히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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