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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Oct 06. 2020

갈등 없는 방역은 가능한가

차벽, 해외여행, 메시지 관리

(표지 사진 출처: http://www.realmeter.net/개천절-드라이브-스루-집회-금지해야-한다70-9)



1. 어떤 추석 대화


지난 추석 연휴, 서울 처가댁에 머무는 중 아내가 시내에 볼일이 있어 혼자 잠시 다녀왔다. 들어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지나가듯 말한다. 

 

"지하철이 시청역에 안 서고 그냥 지나가더라."


같이 듣고 계시던 장모님이 즉각 반응한다. 


"이번 정부는 집회도 못하게 하고 말이야. 자신이 없으니 다 막아버리지."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철없는 나는 꼭 끼어든다. 


"아니 어머님 지하철 안 서는 거는 혼잡을 피하려고 그런 거예요. 촛불집회 때도 그랬고 월드컵 때도 그랬고 어쩌고 저쩌고..."


나보다 쪼금 더 철이 든 아내는 나에게 눈치를 주더니 황급히 화제를 돌린다. 


"근데 오늘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시내에 사람이 많긴 많았어 어쩌고 어쩌고..."


철은 없어도 눈치는 있는 난 애꿎은 도준이를 탓하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도준아 장난감 입에 넣지 말라니까..."


...


 조금 지나서 뉴스를 보니 아찔한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명박산성'에 비견할 만한 긴 경찰 차벽이 광화문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단순히 혼잡을 피하기 위해 지하철 역을 폐쇄한 줄 알았던 내 예상은 틀렸다. 적어도 '집회 자체를 못하게 막았다'는 장모님의 말씀은 정확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자신이 없다'거나 '집회로 표출되는 민심을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집회를 금지했다는 진단에는 전혀 공감이 안 간다. 문재인 정부가 차벽을 세운 것은 오히려 자신감의 발로다. 추석 전 여론조사에선 방역조치의 일환으로 개천절 집회(심지어 드라이브 스루조차)를 금지하는 데 찬성한다는 사람이 71%에 달했다(링크). 오늘 경향신문에 따르면 국민의 77%는 정부의 방역 대응에 긍정적이다(링크).


 우리나라 국민들 사이에서는 방역을 위해 기본권은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으며 경제활동과 크게 상관없는 정치 집회 재개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에 있다. 정부는 사회적 합의를 근거로 집회를 막아섰다. 


 따라서 정부가 국민의 목소리를 선택적으로 듣는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의사표현만 골라서 차단한다는 비판은 유효하지 않다. 집회의 파급력에 겁을 먹었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다. 방역의 효과를 차치하고서라도, 정부 입장에서는 집회를 최대한 막아서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한 선택이다.


 

9월 24일 리얼미터 조사. 국민의 71퍼센트는 개천절 집회를 반대한다.


10월 6일 경향신문 조사. 77퍼센트가 정부의 방역 대응에 긍정적이다.


 

 물론 정부의 차벽이 정치적으로 정당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방역의 관점에서도 적절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행 초기부터 내 일관된 입장은 코로나19의 실제 위험성을 정확히 평가해야 하며 방역으로 인한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방역 수칙을 지키면서 하는 야외 집회의 위험성은 식당에서 밥 먹을 때보다도 낮다. (그 구호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시민들이 나와서 단체로 의사표현을 하겠다면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마스크 착용과 거리두기를 권고/강제하여 안전한 집회를 할 수 있게 유도하면 되지 원천봉쇄는 과하다. 


 결론적으로 나는 정부의 차벽 설치에 비판적이다. 반대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이유가 아니라 비용에 비해 방역의 효과가 적다는 이유에서다. 정부는 이번 집회를 차단함으로써 얻은 정치적 이득까지 고려했겠지만, 표 계산과 무관한 나는 과잉대응의 부작용이 더 우려스럽다.  


 




2. 여행이 필요한 시간


 코로나19 과잉대응의 부작용 중 하나는 사회갈등이다. 강경화 장관의 남편이 해외여행을 간 사실을 놓고 시끄러워지는 것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라면 한평생 일하다 은퇴한 개인이 요트를 구입하기 위해 미국 여행을 떠나는 게 문제가 될 이유가 전혀 없다. '모두가 힘든 시기에 공직자 가족이 흥청망청 돈을 써도 되냐'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회주의자가 아닌 이상 아무리 공직자여도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는 없다(심지어 공직자가 아니라 공직자의 가족이며 실제 흥청망청 쓴 것도 아님).


 문제는 강 장관 가족의 행동이 정부 방역 정책과 충돌한다는 데서 발생한다. 하루에도 수차례 재난문자가 날아온다. 해외여행은 물론 성묘, 가족모임, 예배 심지어 불필요한 외출까지도 하지 말라고 성화다. 중대본, 구청, 시청, 보훈처, 방통위, 공정위, 보내는 부처도 다양하다.


 정부에서 '하지 마세요, 자제하세요, 금지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동안, 사회는 '모두를 위해 지켜야지'라며 순응하는 사람과 '언제까지고 이렇게는 못 산다'며 일탈하는 사람으로 양분되었다. 공직자든 공직자 가족이든 예외는 없다. 어느 시 공무원들은 야유회를 다니다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국회의원들은 식당에서 다닥다닥 붙어 앉아 회식을 하다 걸려 사과를 거듭해야 했다. 누구는 휴가기간에 집에서 넷플릭스만 보고 있는 동안 이일병 교수 같은 사람은 여행을 다녔다.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영국 총리의 수석보좌관 도미닉 커밍스가 자가격리 중 부모님 댁에 방문해 비난을 받았고, 정교한 모델링으로 락다운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영국 정부 과학자문위원 닐 퍼거슨 교수도 락다운 지침을 어겼다는 이유로 사임했다. 



강경화 장관 남편 이일병 교수. 공항 인터뷰.


 지켜지지 않는 지침이 내려오는 동안 순응하는 집단과 순응하지 않는 집단 사이의 반목은 점점 심각해진다. 대규모 감염 확산이 발생할 때마다 방역지침을 지킨 사람들은 억울함을 토로하며 방역지침을 어긴 사람들, 그중에도 실제 감염된 사람들을 가열차게 비난한다. 지킬 거 다 지키며 고생하고 있는데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이 곱게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다. 방역 지침의 주체가 되어야 할 공직자(혹은 그 주변인)가 방역 지침을 어기는 당사자일 경우의 분노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다. 


 그런데, 그런데 문제는 이 지침이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팬데믹이 장기화될수록 방역지침을 지키는 사람의 고통은 점점 커지고 지침을 어기는 사람의 비율은 점점 늘어난다. 이일병 교수의 말이 정확하게 이 현상을 묘사한다. 


 "코로나가 하루 이틀 안에 없어질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만날 집에서 그냥 지키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쯤 되면 우리는 비판의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 정부 지침을 어기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 지침 자체가 문제다. 우직하게 지침을 지키는 사람과 뒤에서 어기는 사람이 나뉘게 하고 그 사이 긴 벽을 쌓아 대립하게 하는 정책은 좋은 정책이 아니다. 어떻게 공직자 가족이 방역 지침을 어길 수 있냐고 따져 묻는 건 이제 그만 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장기화 시대에 맞는 방역으로 신속히 전환해가는 게 맞는 방향이다. 



3. 자율 방역, 그리고 메시지 관리


 '코로나는 감기와 같으니까 마스크 다 벗어던지고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정부는 정확히 평가된 코로나19의 위험성에 따라 각 행동별 장소별 상황별 연령별 세부 행동지침을 만들어 제공하고, 시민들은 각자 스스로 느끼는 위험의 정도에 따라 자율적으로 일상의 범위를 결정할 수 있게 허용하자는 것이다. 정부는 정부의 역할을, 시민들은 시민들의 역할을 하며, 의무도 각자 책임도 각자 지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유행 초기부터 꾸준히 이야기해왔다(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방역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너무 길어짐). 


 그러나 과잉대응을 주문할 수밖에 없는 정부의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얼마 전 공유한 인터뷰에서 오명돈 교수님도 말씀하셨듯, '그냥 각자 조심하면서 일상을 사세요'라는 메시지가 가져올 파급효과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준이에게 마스크를 쓰라고 교육하면서 아내와 의견 차이가 있었다. 나는 야외에서 사람들이 없을 땐 벗고 사람이 많은 실내에서만 쓰게 하자고 한 반면 아내는 상황에 상관없이 무조건 쓰게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제시한 방안이 과학적으로 옳을지 모르지만, 아기가 꾸준히 쓰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결국 실내에서도 야외에서도 다 안 쓰게 된다는 아내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결국 메시지의 문제다. 


 어떤 수준에서 방역 지침을 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내가 이해한 코로나19의 특성에 따르면 정부 지침이 과하다 보지만, 그렇다고 질병이 가지는 영향을 조금이라도 과소평가하는 듯한 메시지를 내면 사람들의 행동을 더욱 통제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과해 보이는 차벽도, 이일병 교수에 대한 비난도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의문이다. 나는 네 살 아이가 아니고, 대부분의 시민은 스스로 행동을 결정할 지성과 합리를 갖추고 있다. 정부와 시민들 사이의 신뢰가 있다면 조금 더 자율적인 방역 방침을 고안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고의로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행위와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유통시키는 행위만 정부가 제제하고, 그 이외에는 시민들이 의무와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허용하는 방향을 고민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냥 대놓고 정부 방침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은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지'라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은 제발 지킬만한 법을 만들어 주면 좋겠단 생각이 먼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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