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Sep 10. 2020

안창호 전 헌법재판관님께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금지 대상

* 본글은 2020년 9월 8일 자 중앙일보 칼럼을 보고 작성하였습니다.

 기사 링크: https://news.joins.com/article/23866656?cloc=joongang-hme-opinioncolumn




안녕하세요 재판관님, 포괄적 차별금지법 관련하여 중앙일보에 쓰신 칼럼 잘 읽어봤습니다. 칼럼에서 재판관님은 차별금지법을 통해 헌법상 평등이념을 실현하고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려는 목적은 좋으나 이대로 시행될 경우 표현의 자유 등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광범위하게 제한하며 민주적·공화적 가치와 헌법 질서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셨습니다.


평생 공정한 집행을 위해 헌신해오신 재판관님 앞에서 제가 주제넘게 법을 논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법은 법조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것임을 기억하며, 쓰신 의견에 몇 마디 제 의견을 덧붙여보려 합니다.


재판관님께서 예로 드신 차별금지법의 제재 대상이 제가 이해한 것과 다소 차이가 있어서 의아합니다. 재판관님은 차별금지법안 3조를 들어 광장에서 특정 이념을 비판하는 행위도 금지 대상이라고 하셨는데, 다른 법조인 분들의 주장을 참고해서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아무래도 재판관님께서 법을 확대해석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차별금지법은 고용, 재화와 용역, 교육, 행정서비스의 4대 영역에 한정되는 바, 광장에서의 의견 표명금지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법안 제3조 1항 2호(간접차별)를 들어 사실에 근거한 비판이나 신념의 표명이 제한받을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이 역시 정확한 말씀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간접차별은 4대 영역에서 외견상 중립적인 기준이 특정집단이나 개인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함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영어 능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직종에 직원을 채용하면서 모든 구직자에게 영어 듣기평가 점수를 요구하면, 외견상 중립적인 기준을 적용했으나 청각장애인을 자연스럽게 배제하게 됩니다. 또한 교육기관에서 체육 과목 실기 평가를 하면서 지체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동일한 평가기준을 제시하면 장애인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재판관님 말씀과 달리 간접차별 조항은 사상적, 종교적 표현을 통해 상대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과 무관합니다.


재판관님은 아마도 법안 제3조 1항 4호(괴롭힘)와 5호(차별조장표시 광고 행위)를 염두에 두고 계신 듯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표현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항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광장이나 방송, 소셜미디어에서 주체사상이나 성적 지향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해도 차별금지법 상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개인 사이에 오간 혐오표현을 제재하는 조항 역시 이번 법안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직장이나 교육기관에서 피고용자나 학생을 '빨갱이'나 '게이'라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심지어 해고하거나 교육 현장에서 배제했다면 그것은 차별금지법의 제재 대상입니다. 재판관님 우려와 달리 "소수자의... 주장과 행위에 대한 이성적 비판과 논의"는 차별금지법이 도입되어도 여전히 가능하며, 이성적 비판과 논의를 넘어서서 타인의 시민으로서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만 제재를 받게 됩니다. 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부분은 분명히 민형사 상 제재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차별금지법은 이런 행위에 대해 인권위 권고의 구속력을 높이려 시도할 뿐, 차별행위에 대한 형사처벌을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재판관님이 채용 부분에서 표명하신 우려 역시 과도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지적해봅니다. 재판관님은 칼럼에서 유치원, 학교 등 교육기관에서 '북한추종자', 동성애자의 채용을 거부할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기우에 불과해 보입니다. 어느 회사도 이력서에 북한을 추종하는지 쓰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적 지향을 묻지도 않습니다. 설령 구직자가 본인의 성향을 먼저 밝힌다 하더라도, 그들을 탈락시킬 때 회사가 탈락 사유를 알려줄 의무는 없습니다. 채용기관은 소정의 절차를 통해 직무에 부적합한 사람을 고용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이는 차별금지법 3조 2항에서도 차별의 예외조항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구직자의 사상 혹은 성적 지향이 왜 탈락 사유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나, 그런 생각을 가진 고용주들이 차별금지법으로 과도한 제재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외에도 무리한 가정과 과도한 우려로 보이는 주장들이 더러 있으나 이 정도로 그만두고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재판관님은 유독 전체주의와 세습 독재에 민감하신 것 같습니다. '북한추종자'를 비판하는 행위를 제한함으로써 "특정 사상"에 "특혜와 특권"이 주어지면 "민주적 가치를 추구하는 헌법 질서가 훼손"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차별금지법을 "사상의 자유 경쟁을 통제하고 정치적 반대 의견을 탄압하는 데 악용하면 민주주의 근간이 훼손될 수 있다"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정치적 반대 의견을 탄압하는 데 악용"되는 국가보안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안창호 헌법재판관님께서는 재임 시 통합진보당 해체에 찬성 의견을 내신 경력도 있으십니다. 재판관님이 이 정도로 시민의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신다면, 혹시 북한을 추종하고 찬양하는 사상의 자유까지 보장해주시려는 마음이 있으신지 매우 궁금합니다.


물론 그럼 마음이 없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재판관님을 이해합니다.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기본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민 사회에서 합의한 헌법의 가치를 온전히 실현해 내기 위해서, 때로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상의 자유는 인정하지만, 반국가단체를 만들거나 내란을 선동하면 법의 제재를 받아야 함이 당연합니다.


저는 차별금지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재판관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누군가 규정한 진리와 진실이, 고용 등 삶에 필수적인 영역에서 타인의 기본권을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침해한다면, 특히 그 "타인"이 스스로를 보호할 권력이 없는 소수자라면, 사회가 마땅히 나서서 그들을 구제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어있는 차별사유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차별금지법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혜영 의원 차별금지법안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 역시 제3조 1항 5호의 광고 행위 범위가 너무 넓어 무리하게 적용될(혹은 적용이 시도될) 우려가 있고, 제12조(근로조건), 13조(임금, 금품지급)가 고용주의 경영권을 과도하게 침해할 가능성이 있으며, 제32조(교육내용의 차별금지)가 학생의 학습권과 교사의 수업권을 제한할 여지가 있는 등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판관님 말씀대로 충분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 없이 성급하게 도입될 경우 오히려 사회갈등과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으니 도입하지 말자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기다리자가 아니라, 평등과 보편 인권을 구현하려는 차별금지법의 취지는 살리면서 재판관님께서 걱정하시는 부분은 해소할 수 있는 더 좋은 차별금지법, 더 좋은 평등법을 만들어가기 위해 함께 노력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런 노력이 있을 때에만 재판관님께서 그토록 염원하시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논의로 그날에 한 발짝 더 다가갔길 소망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북유럽 방역모범국의 현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