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조건 - 영국 vs 남아공 (2)
물가 / 생활비 편
소득 수준이 낮은 나라는 물가도 더 낮은게 보통이다. 영국과 남아공을 단순 비교하면 남아공 물가가 더 낮다.
집 렌트비는 남아공이 영국의 반값에도 못 미친다.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외곽 기준 투베드하우스가 (비슷한 컨디션이라면) 케이프타운은 80-100만원, 런던은 230-280만원 선이다.
장바구니 물가 역시 남아공이 저렴한 편으로, 2인 가족 기준 일주일치 식료품 가격이 (비슷한 품질의 물건을 산다는 가정 하에) 영국에선 10만원, 남아공선 7만원 정도 된다.
외식비도 남아공이 더 적게 든다. 샌드위치나 피자 같은 건 남아공이 영국의 4분의 3 정도 되니 많이 싼 건 아닌데 고급 식당으로 갈수록 차이가 커진다. 2인 기준 영국은 최소 15만원은 줘야 괜찮은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반면, 남아공은 5-6만원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공산품은 가격차이가 거의 없다. 자동차나 가전, 전자제품 등은 영국이나 남아공이나 가격이 비슷하다. 오히려 남아공이 비쌀 때가 있다. 그 흔한 차량용 폰 충전기를 사려고 남아공 여기저기 돌아다녀봐도 최소 8천원은 줘야 해서 못 사고 있었는데, 영국에 1500원짜리가 있길래 바로 집어 들었다.
종합해서 보면 남아공 물가가 영국의 6-70%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남아공 체감물가가 영국보다 더 높은 것은, 남아공 소득 수준이 영국의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치기 때문이다.
남아공 임금 수준은 영국에 비할 것이 안 된다. 최저시급만 보면 영국은 1만 2천원, 남아공은 1600원... 그나마도 잘 안 지켜진다. 케이프타운 근처가 남아공에서 비교적 잘 사는 지역인데도 주변에 시간당 1600원도 못 받고 일하는 사람을 여럿 봤다. 내 기준으로 봐도 신입박사 연구원 연봉은 남아공이 영국의 3분의 1 정도니,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고급인력 임금 수준도 많이 떨어진다.
물가가 3분의 2 정도라도 임금이 그보다 더 낮기 때문에 체감물가는 남아공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위너를 찾자면 영국에서 돈 벌어서 남아공에서 쓰는 사람들. 게다가 영국은 여름 빼고 날씨도 안 좋으니, 영국의 연금생활자나 건물주 중에 케이프타운서 사는 사람들이 꽤 많다 (참고로 내 예전 집주인도 남아공에 살았었다. 나한테 렌트비 받아서 남아공에서 쓰는 위너 중 1인).
사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부터다 (서론이 좀 길었다). 지금까지 물가 수준 비교는 어디까지나 두나라 사람들이 비슷한 삶의 질을 누린다는 전제 하에 한 것이다. 그런데 남아공에 영국인만큼의 삶의 질을 누리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까. 시급 1600원 받는 사람들과 시급 1만 2000원 받는 사람들의 삶의 질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 낮은 임금에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거리에 나앉은 사람이 많으니, 영국과 남아공을 비교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 (2019년 실업률 남아공 27% vs 영국 4%).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남아공은 영국에 비해 소득 수준이 낮은 사람과 소득 수준이 높은 사람의 생활수준 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난 영국 있을 때 학생이었고 학비 내고 나면 소득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최빈민층에 속했었다. 지금은 나름 월급도 꼬박꼬박 받고 남아공에선 낮은 임금을 받는 편도 아닌데, 그래도 삶의 질은 영국에서 더 높았었다.
식료품을 예로 든다면, 영국은 소득이 높은 사람이 가는 마트와 소득이 낮은 사람이 가는 마트가 나눠져 있다. 보통 잘 사는 사람들은 M&S나 Waitrose에, 중산층은 Tesco, Sainsbury, Asda에, 가난한 사람들은 Iceland나 Lidl, Aldi에 가서 장을 본다. 가격도 다르고 어느 정도 제품의 질에도 차이가 있지만, Aldi에서 장을 본다고 먹으면 죽을 거 같은 음식을 팔지는 않았다. 어떨 땐 Lidl, Aldi 과일이 Waitrose 과일보다 더 맛있을 때도 있다. 외식이야 워낙 비싸니 자주 못하더라도 싼 마트에서 장 봐서 해 먹으면 생활비가 그렇게 많이 들진 않았다.
남아공도 역시 식료품점의 계급이 나누어져 있다. Woolworth 같이 고소득자들이 주로 가는 마트에 가면 영국에 있을 때아 비슷한 수준의 식료품을 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저소득층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가는 마트엔 유통기한이 언제인지 모르는 물건들이 엉망으로 진열되어 있어 한두 번 가고 다시 갈 엄두가 안 났다.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은 재래시장 비슷한 동네 시장이나 길거리 상인들에게 야채, 과일을 산다는데 물건의 질은 차치하고도 위험하다는 소문이 돌아 차마 가보지 못했다.
이전 편에 잠깐 언급한 공공서비스도 마찬가지다. 공원뿐 아니라 박물관, 미술관 등도 영국은 대부분 무료였다. 의료시스템도 잘 되어 있어서 저렴한 보험료에 꽤 수준 높은 무상의료 혜택을 준다. 도준이 태어날 때 돈 한 푼 안 냈으니 우린 본전 찾고도 남았다. 육아 편에 더 자세히 쓰겠지만 지역 정부나 교회에서 애기가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무료로 혹은 저렴하게 운영해서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
남아공에서는 여러 이유로 공공서비스가 엉망이다. 영국에서와 똑같은 수준의 혜택을 누리려면 비싼 돈을 지불해야 한다. 여가활동을 하려면 사설 와인농장이나 동물원에 가야 하고, 비싼 보험료를 내야 그나마 괜찮은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영국 민간보험과 가격 비슷함. 월급은 반도 안되는데!), 플레이그룹도 하나하나 다 등록비를 내고 가야 한다. 저소득층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실제로 와인농장을 가든 사설 플레이그룹을 가든 백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내가 새삼 영국이 선진국이라고 느낀 이유는,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내가 영국 중산층이 누리는 삶에서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절대적 물가와 상관없이 소득 수준 하위 계층의 삶의 질이 상위계층과 큰 차이가 없는 곳이 진정으로 발전한 사회이다. 영국 살 땐 욕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발전한 사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