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레스 컬러드 커뮤니티 방문기
Ceres에 다녀왔다. 애들 음료로 인기 있다는 세레스 주스의 원산지인 바로 그곳이다. 선교사 친구들이 사역지를 돌아보러 간다길래 여행 겸 따라갔다.
세레스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 지형에 일조량이 높아 과일과 채소 생산에 최적화된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사과 특산지 대구). 남아공 최대 과일 생산지답게 수십 개의 대규모 농장이 산기슭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
우리를 초청해주신 Cecil 목사님은 이 지역 14개 농장을 돌아다니며 교육 및 구제 사역을 하고 계신다. 오늘은 그중 한 농장에서 드린 예배에 참석하였다. 외국인이 이 교회에 방문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눈빛으로만 반겨주고 선뜻 다가와 말을 거는 분이 없었다. 수줍게 웃으며 도망가는 분들을 목사님께서 굳이 붙잡아 우리에게 소개해 주시고 한마디라도 더 하게 시키셨다.
이후 목사님과 얘기를 나누며 다소 어색한 그 행동에도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됐다. 농장 사람들은 백인 농장주를 제외하면 대부분 컬러드(Coloureds, 남아공서 혼혈인종을 지칭하는 단어)들이다. 농장 자체도 넓고 도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보니 이곳 주민들의 생활 반경은 농장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만나는 사람들도 농장 동료들이나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로 제한이 된다. 이 곳 아이들 역시 농장에서 태어나 평생 여기서 일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들 눈에 가장 멋지게 보이는 건 트랙터를 모는 사람이고,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트랙터 기사를 꿈꾼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목사님은 기회가 될 때마다 이 곳 청년들의 시야를 넓혀 주려 노력하셨다. 농장 바깥의 사람들이 뭘 하고 사는지 보여주기 위해 시내에도 데리고 나가고 대학도 둘러보는 게 목사님의 주요 사역 중 하나였다. 이번에 우리의 방문도 이들에게는 굉장히 특별한 일이고, 한마디라도 더 나누게 해서 외부에 대한 노출을 조금이라도 더 늘려보려는 마음이 목사님께 있었던 것 같다.
컬러드는 이 곳 세레스 전체 인구의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지만 남아공 전체로 보면 채 10퍼센트도 안 되는 소수 인종이다. 컬러드에 대한 정의도 따로 없고 흑인도, 백인도, 아시아인도 아닌 사람을 그냥 컬러드로 분류한다. 목사님이 한계를 느끼는 부분도 본인의 "Colouredness"와 연관이 많다고 하셨다. 백인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갖고 흑인은 집권당의 정치력으로 여러 혜택을 받는데 "충분히 희지도 충분히 검지도 않은" 컬러드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되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정부나 NGO에 이들을 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안할 때마다 번번이 거절당하는 것도 컬러드에 대한 편견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삶이 개선되기가 쉽지 않다. 목사님이 제일 안타까워하시는 부분은 알콜중독과 아동학대였다. 월급의 일부를 와인으로 주는 악명 높은 dop system 때문에 많은 농장 인부들이 어릴 때부터 알콜중독에 빠진다. 월급과 지원금 중 남는 돈은 전부 술을 사는데 써버려서 저축도 투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또한 아이들이 가정에서 일상화된 언어적, 신체적 폭력에 노출되는 문제가 있다. 정부에서 아이 수에 따라 지원금을 주기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기 시작하는데, 부모가 될 준비가 안된 청소년들이 아이를 여러 명 데리고 있으니 제대로 된 육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그들의 부모로부터 받았던 학대가 대물림되어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남아공 과일 최대 생산지라는 허명 아래 소외된 컬러드 커뮤니티,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삶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조차 모르고 산다. 더 행복한 삶, 더 윤택한 삶의 모델을 볼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이 곳 아이들에겐 꿈을 꿀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트랙터를 모는 삶이 열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다.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은 "자유로서의 발전 Development as Freedom"이라는 책에서 발전을 자유의 확장으로 정의했다. 내가 어떤 스타일의 삶을 살고 어떤 재화를 소비할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곳이 발전한 사회이다. 소득이 자유의 확장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교육과 건강, 정치제도와 평화 등도 같이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요새 우리나라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 구조적 불평등은 인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한다.
컬러드들이 직면한 문제도 이 구조화된 불평등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백인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더 공고히 하려고 비백인인구의 경제권, 교육권, 참정권 등을 박탈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분리의 영향이 남아있는데, 특히 소외된 계층 컬러드들에게는 변화가 더 더디게 일어나는 듯했다. 짧은 대화 중에도 여러 번 자신의 피부색을 자책하시는 목사님의 깊은 좌절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자책은 항상 "그래도 우리는 해낼 것입니다 But we're going to make it"라는 희망의 말로 맺어졌다. 그리고 목사님의 노력에도 조금씩 열매가 나오는 듯하다. 작년 처음으로 농장 아이 한 명이 교사 양성과정에 입학했고, 올해는 네 명이 입학했다고 한다. 이들이 과정을 잘 마칠 수 있을지, 과정을 마친 후에 실제로 원하는 직장을 얻을 수 있을지 난 알 수 없다. 그러나 끊임없이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목사님의 수고와 열정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남아공에 온 지 막 6개월이 지났다. 내가 남아공에 왜 왔을까,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아직도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한국에 있었으면 못 했을 경험들을 많이 한다. 내 연구의 주제와 연구를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