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문풍지가 울어대는 겨울밤은 깊고도 길었다. 초저녁에 땠던 군불의 온기가 사라
지는 새벽녘에는 방 윗목은 얼음장 처럼 차
가워 모두가 아랫목으로 파고든다. 서로의 체온으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한다.
윗목에 두었던 자리끼는 새벽 추위에 얼어 있곤 하였다. 엄니는 차가운 우물물로 세수
를 하시고, 비녀를 고쳐 꽂고 부엌으로 나 가신다. 줄기에 달린 감자알 처럼 자식 많이 낳은 죄로 자식들 끼니와 입성 걱정만 하시다
가 한평생 살다 가셨다.
길고 길었던 동장군이 물러가고 나면 앞산의 솔송나무 색깔이 푸르름을 더해가고 갈참나무 굴참나무 사이사이로 진달래 붉은 꽃잎이 보이 고 나물캐는 아낙들 머리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 오를 즈음에 멀리 산비탈 마을은 살구꽃과복사꽃으로 붉게 물든다.
예전에 살든 집에는 가지가지 과실 나무들이 참 많았다. 해 마다 철 따라 피는 과실 나무 꽃 들이 순서대로 피어난다. 우물가에 나즈막한 앵두나무가 제일 먼저 꽃망울을 터뜨린다. 가녀린 가지에 꽃송이들이 옹기종기 따닥 따닥 붙어 핀다. 곧이어 사립문 옆 살구나무 에 연분 홍 살구꽃이 피어나고, 사랑채 지붕 뒷켠에도 *오얏나무 꽃이 어느새 피어있다. 이른 봄에 피는 꽃은 모두가 잎이 나기 전에 꽃을 먼저 피운다. 온 동네가 덩달아 환하게 피어난다. 포도나무나 감나무 대추나무는 잎이 푸르른 후에 꽃을 피우기에 꽃이 핀지도 모르는 사이 에 꽃이 진다.
과일나무 꽃들이 모두 피고 떨어진 후에는 잎
이 무성해지고 본격적인 더위가 기성을 부릴 때 즈음에는 언제 그렇게 굵었는지 살구나무 에는 제법 토실토실한 노란 살구가 조롱조롱 달려있고 사랑채 뒤켠에도 오얏의 자주색이 힐끔힐끔 보인다. 오얏 맛은 살구와 달리 신맛 과 단맛이 조화를 이루어 시골에는 오얏이 더 인기가 높다.
어느 초여름, 형과 나는 오얏 *서리 모의를 했다. 기실은 그 오얏나무는 우리집 사랑채 뒤켠에 서있지만 뒷집 달호네 밭 모퉁이에서 자란 나무다. 그런데 오얏나무 가지가 우리 집 사랑채 지붕 위를 넘어와 있기에 소유권(?)이 애매했다. 어느날 형과 나는 달빛이 어두운 그믐날 밤을 오얏털기 작전 D-day 로 잡았다. 사립문 옆 낮은 쪽 담을 타고 올라가 *뒷간채 를 넘어 사랑채 지붕에 올라 오얏나무 가지를 훑어 오얏을 *난닝구 속에 담아 내려오는 계획 을 실행하기로 했다.
작전은 대체로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엄하신 아버지도 학교에서 일찍 퇴근하셔서 저녁 식
사 후에 자리에 드시고, 종일 힘든 일에 지치신 엄니도 초저녁에 누우셨다. 동생들도 조용한 걸 보니 자는 듯했다. 형과 나는 늦께까지 공부 를 하는 척하다가 호롱불을 끄고 작전을 개시 했다. 담을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는 일은 내가 맡았다. 체조를 좀 했기 때문에 기동성은 내가 더 좋았다. 형은 마당에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망을 보기로 했다.
담장에 오르기 전에 나는 난닝구 아랫단을 바지 속에 넣고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 매었다. 그리고는 단숨에 담을 타고 지붕에 올랐다. 뒷집 달호네도 어둠 속에 인기척이 없고, 앞집 구상댁도 누렁이마저 짖지 않고 조용했다. 지붕 위의 오얏나무 가지를 휘어잡으니 탐스런 오얏이 군침을 돌게했다. 냅다 가지를 훑어 난닝구 속에 밀어 넣었다. 잽싸게 우리집 지붕 위의 가지들은 거의 다 훑어 넣고 담을 타고 내려왔다.
"아 아 ~앗"
내려 오자마자 나는 난닝구 속에 든 오얏을 마당에 쏟아내고 딩굴기 시작했다. 형이 놀라 "왜, 왜" 하면서 놀라 허둥댔다. 와, 이게 왠 일인가? 오얏과 함께 난닝구 속에 들어간 오얏 이파리에 붙어있던 *풀쇄기가 쏘기 시작했다. 전에도 감나무 이파리에 붙어 있던 풀쐐기에 쏘인 적이 있어 그 따가움을 형도 잘 알았다. 뱃가죽이 부어 오르고 따가운 통증이 온몸을 덮쳐왔다. 난닝구를 벗어 던지고 개울물에 뛰 어들어 긁기 시작했다.
"어휴~"
천벌을 받은 거였다. 남의 집 자두를 서리한 댓가였다. 그 때 훔쳐 먹은 자두맛은 기억에 없다. 아마 형은 맛있게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풀쐐기에 대한 공포심만 깊어갔다. 그 거사를 치런지 며칠 뒤에 달호 아버지가 다녀 갔다. 지붕 위 자두나무 가지에 달렸던 자두가 사라진 일, 담장과 뒷간채와 사랑채 지붕 위에 거사의 흔적들을 남긴 장본인으로 나와 형이 지목 되었고, 우리는 아버지의 회초리 앞에 종아리를 걷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엇그제 천도 복숭아와 오얏을 좀 샀다. 과일은 제철 과일이 좋다는 말을 듣고 살아서인지 요즘이 제철인 오얏과 살구 복숭아가 생각이 났다. 오얏을 먹다 뜬금없이 그 때 그 거사가 생각났다. 육칠십 년 전의 거사였는데 그믐날 밤 마당에서 망을 보았던 형은 사오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때 쏘였던 오얏나무 풀쐐기 의 따가움은 아직도 남아있는 듯하다. (끝) 2025.6.28 jjkim
*오얏: 자두, 자도(紫桃)
*서리: 남의 과일이나 곡식을 훔쳐 먹는 장난
*난닝구: 러닝셔츠의 방언
*풀쐐기: 불나방의 애벌래
*뒷간채: 화장실 헛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