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책

소제목: Only books abide

by Morpheus

그때는 그랬다.

유월 초가 지나면 모내기도 끝나고 시골에는 할 일이 별로 없다. 농사일 중에도 벼농사가 으뜸 이기 때문에 이른 봄에 모판을 만들고, 농부들은 정성을 다해 벼모종을 가꾼다. 모판에 물이 많아도 적어도 안 된다. 참새들이 볍씨를 먹을까 봐 보초(?)를 서고, 황새가 날아와 모판에 앉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이렇게 해서 모내기가 끝나면 농부들은 한시름 놓는다. 냇가에 나가 천엽(川獵)을 한다든가 밤에는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짰다. 가난했던 시골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뒤돌아 보면 참으로 궁상맞고 거친 삶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오늘 같이 온종일 비가 오는 날이 그렇게 좋았다. 타들어 가는 고추밭에 물을 주지 않아 좋았고, 들에 나가 김을 매지 않아서 좋았다. 무엇보다도 종일 배를 깔고 책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이웃에 사는 외사촌들의 공부방에 읽지 않고 진열(?)된 책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사정 사정하여 빌려온 책들을 밤새워 읽었다.

'죄와 벌'의 라스코리니코프 보다는 라쥬미힌의 정직함을 좋아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보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Enoch Arden'을 읽으며 필립과 아덴의 숭고한 사랑의 모습에 감동도 했다.


'... 날아가는 한 마리의 철새, 추수 후의 텅 빈 밭과 밭들, 어릴 때 살았던 적이 있는 조그만 지방에, 긴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들렀을 때, 이제는 아무도 당신을 알지 못하고... 그때 놀던 자리에는 붉고 거만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으며, 당신이 살던 집에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황제처럼 멋지던 아카시아 나무와 우거진 풀은 베어졌는지 찾을 수가 없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지금도 흉내 내고 싶은 마음속의 걸작으로 남아있다.


그때는 그랬다.

전깃불이 없던 그때는 그랬다. 제사라도 지낸 날 밤이면 타다 남은 양초를 몰래 감춰 두었다가, 한 밤에 촛물로 방바닥에 촛불을 붙여 세우고 책을 읽었다. 반딧불과 눈(雪) 빛으로 책을 읽었다던 '형설지공(萤雪之功)'은 아니었지만, 호롱불도 마음껏 켜지 못했던 그때는 그랬다.


오늘 같이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뒤돌아 보면 그때 그 서러움을 어떻게 참고 견디며 살아냈는지.. 아득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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