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밤 스토리

by Morpheus

기억(记忆)이 제법 영글어가던 초등학생 시절을 기점으로, 매년 여름은 정말 길고도 더웠다. 그렇다고 기억이 무디었던 어린 시절의 여름은 덥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기억이 되지 않을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름이 단순히 기온이 높아 더운 것은 아니었다. 에어컨은 말할 나위도 없고, 선풍기조차도 없었던 시골의 여름, 더위를 식힐 수 있는 것은 대나무살에 한지(韓紙)를 붙여 만든 부채와, 뒷문을 통해 불어오는 한가닥의 미풍(微风), 그리고 뜨거운 *갱빈가를 흐르는 개울물이 전부 였다.


여름밤은 짧지만, 그 시절의 여름밤은 겨울밤보다 길었다. 발가벗고 있어도 끈적거리는 몸뚱이를 몇 번이고 개울물에 담갔다 나와도 잠은 오질 않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모기는 왜 그리 많던고? 개울가에 자라는 *구문초를 베어다 앞마당에다 모깃불을 지펴놓으면 매캐하고 칼칼한 생연기가 모기들을 쫓아내는 유일한 방도였다. 하지만 새벽녘에 모깃불이 사그라 들면 벌거벗은 몸뚱이는 모기들의 만찬장이 된다.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동네 사람들이 개울에 나와 멱을 감았다. 개울 위쪽에는 여자들이 멱을 감았고, 아래쪽 멀지 감치 떨어진 곳에 남정네들이 멱을 감곤 했다. 다들 벌거벗은 몸으로 시원하게(?) 물에 뛰어들곤 했다. 수영복이다, 비키니 다하는 용어가 없었던 시절의 '필연적 나체주의자 들'이었다.


어느 유별나게 더웠던 날 밤에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동네에서 제일 예쁘다던 안골의 박 과수댁 셋째 딸이 개울 깊은 곳에 빠져서 가라앉아버렸다. 같이 멱감던 여자들이 "사람 살려라"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난리를 쳤다. 마침 아랫물에서 멱을 감던 성호가 팬티만 걸치고 뛰어와 여자애를 건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몸이었다. 성호는 어쩔 줄을 몰랐지만, 여자애를 뒤집어 등을 두드리니 물을 토하며 살아났다. 물에 가라 앉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그 과수댁 딸은 발가벗은 것을 알고는 옷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내빼버렸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면 물귀신이 언젠가는 건진 사람을 해코지한다는 속담이 있어, 액땜을 하기 위해서라도 건진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한단다. 아마도 벗은 여자의 몸을 다 보여준 처지뿐만 아니라, 생명의 은인이니 여자 쪽에서 성호와 혼인을 시켜야 한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 후 성호와 그 여자애가 결혼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그 아이의 몸은 이미 '여자의 몸'이었다는 것과, 그 사건 이후 성호는 그 과수댁 딸을 무척 좋아했다는 고백도 있었다.


흘러간 지난 어느 여름밤의 뜬금없는 이야기다.


*갱빈: 강변(江邊)의 경주지역 방언

*구문초: 로즈제라늄, 쥐손이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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