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목: 무풍(無風)의 세월
동네가 그랬다. 바람이 많지 않았다. 동쪽에는 안태봉이라고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산줄기가 두텁게 바람골을 막고 있어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는 말은 맞지 않았다. 서편에는 구미산이 마치 제삿날 병풍처럼 앞을 막아 들어온 구름마저 가둬버렸다.
여름은 더웠다. 소나기라도 한줄기 퍼붓고 가는 날에나 광풍이 미친 듯이 아낙네들 무명치마를 휘감고 지나가곤 했지만 바람은 항상 높디높은 고목(古木) 위로만 고고하게 지나가곤 했다. 가끔씩 썩은 가지가 그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땅바닥에 내동 이쳐지곤 했다.
언젠가는 동네 어른들이 고목 아래서 바둑을 두고 있는데 구렁이 한 마리가 썩은 가지를 타고 가다 가지가 부러지면서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검은 흑구렁이 었다. 그 넘이 동네를 지켜주는 수호사(守護蛇)라고 보내줘야 한다는 어른들과 팔자는 어른들이 옥씬각씬했는데 그 흑사(黑蛇)를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괴이한 바람도 있었다. 증조부가 세상을 하직하고 장사 지내던 날, 머루골 아름드리 장송(長松)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때 처음 솔바람 소리를 들었다. 마치 높은음의 휘파람 합창처럼 여운을 남기며 지나갔다. 긴긴 세월을 산골에서 사시다가 이제 아들 딸 손주들을 떠나 선조들이 묻혀있는 선영(先塋)에 입주하는 할아버지를 위한 영혼의 환영식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결 같은 부드러운 바람도 있었다. 소나기가 지나간 오후, 햇볕에 반짝이는 보리밭이랑을 따라 올자란 보릿잎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왈츠곡에 맞춰 춤추는 여인처럼 부드러웠다. 이맘때면 보리밭이랑에 둥지를 튼 종달새 어미가 알에서 갓 깨어 난 새끼들을 지키느라 하늘 높이 날아올라 종알종알 지저귀고 있었다.
채전밭 울타리를 따라 엄니는 완두콩을 심었고 담장 밑에는 호박씨를 심었다. 좁은 채전밭에는 상치며 가지, 고추도 심고 한쪽에는 자주감자도 심었다. 여름 내내 엄니는 무명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자식 키우듯이 생명을 보듬어 가셨다. 미풍조차 불지 않는 채전밭 울타리 안에서 말이다. 그리고 가을이 올 무렵, 채전밭 울타리에는 알알이 영근 완두콩이 조롱조롱 달려있고, 엄니는 말라빠진 완두콩 줄기가 되어 떠나가셨다. 무풍(無風)의 세월을 뒤로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