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비(雨)

by Morpheus

대지(大地)를 내리쬐는 한낮의 열기는 모든 것을 녹일 듯이 대차다. 누구도 이 더위를 피할 길이 없다. 털 달린 짐승들에게는 특히 힘든 계절이 아닐 수가 없다. 누렁이와 고양이가 마루 밑에 숨어들어 혀를 길게 빼고 연신 더운 숨을 뱉어 내기 바쁘다. 새끼 밴 암소는 외양간에서 되새김질하는 숨소리가 힘들어 보인다.


우물가 앵두나무와 청포도 잎사귀도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흐느적거린다. 담 넘어 구상댁 개살구는 뙤약볕에 익을 대로 익어 샛노랗다. 지나는 실바람에도 땅에 떨어져 뒹군다.


내일 모래면 여름방학에 들어가는 초등생들은 날씨가 더우니 오전수업만 하고 일찍 하교하였 단다. *책보자기를 툇마루에 던져놓고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개울가로 내달린다. 달려가면서 웃통과 바지를 벗어 개울가에 던지고는 개울에 풍덩 몸을 던진다. 한낮의 더위는 물거품에 부서진다.


머리 위에서 내리쬐던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멀리 있던 뭉게구름이 어느새 검게 퍼진 비구름이 되어 낮게 내려와 산중턱에 걸친다.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황새가 끼 억 끼억 하며 산기슭에 있는 둥지로 찾아 들기 시작하면 난데없이 일진광풍 (一阵 狂风)이 어지럽게 휘몰아친다.


험하게 불던 바람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서산 중턱에 뿌옇게 내려앉은 비구름 사이에 세찬 빗줄기가 병풍처럼 쳐진다. 밭에서 일하던 석준이 부부가 누른 황소를 앞세우고 종종 걸음으로 집으로 찾아든다.


비는 어느새 앞마당까지 점령한다.

소나기는 마치 뜨거운 가마솥에 미꾸라지가 튀듯이 따닥따닥하며 황톳마당 위를 때린다. 열기에 달았던 황톳마당의 흙냄새가 매캐하게 피어오른다. 천둥 번개가 한 두 차례 지나가고 소나기는 본격적으로 대지를 점령한다. 처마 지붕에서 낙숫물은 세주렴 (细珠簾)처럼 주루루 흘러 내린다.


한참을 쉼 없이 쏟아지던 소나기는 어느덧 뒷마당에서부터 작은 물줄기를 이루며 앞마당을 지나 사립문을 나선다. 뜨거웠던 땅의 열기를 식히며 분진(粉尘)으로 오염된 세상사를 청소라도 하는지 지나간 자리가 마뜩하다.


퍼붓던 빗줄기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서산 하늘에 밝은 빛이 보이며, 구름 사이로 파란 조각의 하늘이 얼굴을 내밀면 산기슭까지 내려왔던 운무(雲雾)가 퇴각하는 군병들 처럼 산마루를 오른다.


앞마당을 떠난 물줄기는 합류(合流)에 합류를 거듭하며 도랑이 되고, 개울이 되어 제법 콸콸 거리며 강으로 흘러간다. 한줄기 소나기가 지나간 산하(山河)에는 모든 초목들이 단비의 향연을 즐긴다. 버드나무 이파리는 다시 햇볕에 반짝이고, 채전밭에는 강낭콩이며, 고추며 가지 줄기가 싱싱함을 더해간다. 자주색 꽃을 피운 감자밭에서 이랑을 돋우시는 무명저고리 입은 엄니의 겨드랑 사이로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지나 가고, 한여름 날은 저물어간다.


*책보자기: 책가방이 없어 책을 보자기에 싸 허리에 동여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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