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鐘 이야기)
남산 돌은 다 옥돌이라 했던가?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수 많은 이야기가 서려있는 땅, 서라벌의 땅 속에는 죽은 자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 이야기들이 묻혀있다. 산 자들이 캐내고 또 캐내어도 무궁무진하다. 정사(正史)는 물론이거니와 야사(野史)도 끝이 없다.
고향 경주를 자랑하려는게 아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서라벌 총가구수가 대략 17~8만이었다니 가구당 대여섯 명만 잡아도 인구는 100만을 넘는다. 놀라운 것은 당시 모든 가구가 숯불로 취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엄청난 문명사회였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전국의 중고등학교 졸업여행이나 수학여행의 최고의 목적지가 경주였다.
신라 42대 흥덕왕 때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고향집 경주 질매산 기슭에 고목나무들이 하늘을 찌를듯한 숲 속에 "신라효자손순유허 비(新羅孝子孫顺遗虚碑)" 가 세워져 있고
그 비석을 외가 쪽 인사가 오래토록 관리를 해 왔다. 경주 월성 손(孫)씨 후예들의 자랑 거리였다.
손순(孫顺)이란 부부가 노모(老母)를 모시고 살았는데 살림살이가 넉넉치 못해 품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고기 반찬을 해서 밥상에 올리면 철없는 어린 아들이 할머니 옆에 앉아 할머니가 주시는 고기를 낼름낼름 받아먹으니 손순 부부는 여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할머니들의 손주 사랑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자식은 또 나면 되지만 어머니는 한 번 가시면 돌아오지 못하니 .. " 어찌하리오. 어느 달 밝은 밤에 손순 부부는 아이를 업고 가 개울 건너 산 기슭에 아이를 묻어버릴려고 괭이로 땅을 찍는 순간 "띵"하는 소리가 나 파보니 석종(石鐘)이었다. 손순 부부는 "이는 필시 아이를 묻지 말라" 는 계시로 받아들여 돌종을 지고 아이를 도로 업고 돌아왔다. 그 돌종을 처마 끝에 매달아 놓으니 바람이 불 때 마다 종소리가 대궐까지 들린지라, 임금이 자초지종을 듣고는 손순의 효성을 기려 기와집과 해마다 벼 오십 석을 하사했다는 이야기다.
소현리(小見里) 질매산 기슭에 몇 백 년도 넘는 고목나무 숲 속에 "신라효자손순유허 비" 에 그 때의 이야기를 품고 서있는데, 정사 고 야사고 간에 고만고만한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으나,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가 따다 준 잘 익은 홍시(红柿)를 오물오물 드시면서 들려주시던 외할 머니의 이야기가 정사(正史)인냥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註) 현재 남아있는 비각(碑阁)과 비석은 1960년대에 세워졌다. 글쓴이의 기억 속에는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비석은 마모가 심해 부근 어딘가에 묻었으며, 그 때는 비각도 없이 비석만 덩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