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실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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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pheus

아버지는 경주의 어느 작은 국민학교로 전근하게 되셨다. 정식으로 교감은 아니었으나 아버지 보다 한 두 살 아래의 장 교장 선생님은 아버지를 교감 선생님으로 높여 호칭(呼称)하셨다.


경주와 인접해 있긴 하였지만 그곳은 주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었고, 선생님이란 직업은 특별히 존경을 받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 호칭도 '김 선생댁'으로 구별되었고, 가난하였으나 사람들은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선생댁 아들이었으니 밖에 나가면 조신하게 행동하고 예의 바르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 입새부터 남루하게 뵈지 않도록 어머니는 항상 떨어진 곳은 꿰매고 깨끗하게 빨아 입혔다.


다섯 살 때가 되던 해였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머리 정수리에 종기가 났다. 소위 두창(頭瘡)이 생긴 것이었다. 초기에는 머리에 부스럼 정도로 알았으나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하게 정수리를 파고 들어갔다.


한 집 건너 이웃에 외갓집이 있었는데, 집울타리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느티나무 속껍질을 벗겨 절구에 찧어서 심지를 만들어 머리 정수리에 박았다. 처음에는 오래된 된장을 바르기도 하고 별의별 처방을 다 해봤으나 낫지를 않자 느티나무껍질 처방을 한 것이었다.


그 당시 경주시내에 한약방이 하나 있었다는 말은 들었으나 병원이나 약국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은 없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두창이 생기면 치료가 어려웠고 목숨까지 위태로웠다. '김 선생댁 아들' 이라 해도 별 도리없이 목숨이 간당간당했다. 그 어린 나이에 죽음에 대한 의식이나 두려움을 알았겠나 마는 느티나무 심지를 갈아 낄 때의 통증은 기억이 생생하다. 지나간 기억 속의 아픔은 아프지 않다. 그냥 유추와 기억만 남아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김 선생댁 아들'을 살리려고 작정하신 모양이었다. 장 교장 선생님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페니실린'을 구해서 직접 엉덩이에 주사를 놓아주셨다. 그리고 '아까징끼(빨간물약 /일본어)' 라는 약을 상처에 발라주셨다. 몇 번이나 주사를 맞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느티나무 껍질 심지는 더 이상 박지 않았고 정수리의 두창은 말끔히 나았다. 장 교장선생님은 아침 일찍 먼 논둑길을 걸어와서 엄청 아픈 주사를 잘도 참고 맞았다 측은해하시면서 꿀을 한 숟갈씩 입에 넣어주셨다. 그때는 꿀이 참 귀했다.


아버지도 가셨고, 그렇게 많은 정(情)을 주셨던 교장선생님도 오래전에 가셨다. 지워지지 않는 아릿한 그리움만 남겨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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