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눈에도 당연하게 보였다. 잘못하면 누구든 야단을 맞는다는 것은 사대(四代)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위계(位階)였다. 사랑채에는 증조할아버지 방문이 삐죽이 열려 있었고 얕은 기침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망건(網巾)을 쓰신 할아버지의 이마가 팽팽해 보였다. 굳은 입술과 단단한 눈빛은 할아버지가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정지*에는 엄니와 숙모의 낮은 목소리가 두른 두른 들린다. 어젯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밤늦게 퇴근해서 어른들이 걱정을 하셨다는 얘기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시오리(十五里) 길이나 되고 산고갯길을 넘어와야 한다. 낮에도 인적(人跡)이 없어 으스스한 적막한 길이었다. 그 밤길을 술에 취해 넘어셨다니..
할아버지는 행여나 사랑채 증조부와 부엌의 자부(子婦)들이 들을까 봐 억제된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를 야단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벌을 받는 죄목(罪目)은 반필면(反必面)이었다. 귀가하면 반듯이 얼굴을 보여 무사함을 아뢰야 한다. 자식들의 출입(出入)은 자유로웠으나 곡(告)*과 면(面)은 엄격했고 출(出)과 입(入)의 사이는 효(孝)로 이어져 있었다.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아버지는 어김에 대한 후회보다 끊어짐에 대한 아픔이 무거웠다.
아침 출근 전에는 반듯이 증조부와 할아버지 께 다녀오겠다는 인사는 불문율이었다. 중풍으로 누워계신 할머니는 언어의 소통 아닌 눈빛으로 아들의 출근길 출필곡 (出必告)을 받으셨다.
증조할머니의 생애(生涯)는 우리 대(代)와 는 겹치지 않으셨다. 증조부가 돌아가시던 날의 스토리는 마을의 레젼드(傳說)가 되었다. 가시던 날 아침, 다랫골 선영 (先塋)을 둘러보시고 내려와, "오늘 가야겠다"라고 하시고 떠나가셨단다. 백수(百壽)를 채우신 그 이듬해였다. 천수(天壽)를 살아내신 것이다. 당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지금 나는 아버지를 넘어 할아버지가 사셨던 연대(年代)를 지나고 있다. 손주들의 등하교 때 "출필곡반필면(出必告反必面)"은 언감생심( 焉敢生心)이나, 아이들의 분방함 속에서도 혈연(Lineage)의 정(情)이 단단함을 느낀다.
정지* : 부엌의 지역 방언
곡(告)*: 아뢰다의 의미.. "곡"으로 발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