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수박

by Morpheus

예나 지금이나 녹음이 우거지고, 여름이 깊어
지는 7월 중순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연일 뜨
거운 열기가 대지를 달군다. 가끔씩 소나기는 지나가지만 장마가 끝나고 중복(中伏)과 대서 (大暑) 란 절기가 되면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

한낮이면 타는듯한 더위에 수양버들도 늘어지고, 밭에 심은 온갖 작물들이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마당을 뛰어다니던 누렁이도 마루 밑으로 들어가 혀를 석자나 내놓고 흑흑 거린다. 헛간 닭장에서 알을 품는 암탉도 연신 혀를 빼고 더운 숨을 몰아쉰다.

일찍 귀가한 조무래기 초등생들은 개울에 나와 앙상한 갈빗대를 들어내고 물장구치기에 여염이 없다. 발가벗은 야윈 몸뚱어리가 못 먹어 영양실조라도 걸린 듯 얼굴은 푸르죽죽하다. 그래도 시원한 개울물이 있으니 마냥 신나고 행복하다.

어느 *반공일(半公日) 오후 엄니는 채전밭 끝에 있는 감나무 밑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시내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형이 처벅처벅 개울을 건너오자마자 감나무에 올라가 책을 읽는다. 얼마 후 형을 뒤따라온 어느 아낙이 엄니에게 저 감나무 위의 학생이 댁의 아들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댁의 아들이 자기네 수박밭에 들어가 수박을 훔쳐먹었단다.

가슴이 찢어지고 하늘이 무너진 듯 엄니는 형을 감나무에서 끌어내려 물가에 꿇어앉혀 놓고 물에 젖은 고무신을 벗어 형의 등짝을 후려친다. 죽을 죄라도 지은 듯 형은 아무 댓 구도 못한 체 등짝에 피멍이 들도록 맞고 또 맞았다. 때리다 지친 엄니는 형을 끌어안고 서러워 우신다. 형도 닭구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훌쩍훌쩍 운다.

비록 가난하여 잘 입히지 못하고, 잘 먹이지 못했지만 어찌 남의 집 수박밭을 탐한단 말인가?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국민학교와 중학교에서 공부 잘한다는 소문난 '김선생댁' 장남인데 엄니는 억장이 무너진다. 빨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엄니는 집으로 들어가 그 더운 방에 이불 뒤집어쓰고 몸져누우신다.

나중에 형에게 자초지종(自初至终)을 들었다. 반공일이라 점심도 먹지 못하고, 오후 수업 한 시간을 마치고 시오리(十五里) 길을 걸어 귀가하는데 하구리를 지나 개울가 길 옆에 새로 개간한 밭에 수박밭이 있는데 주먹만 한 수박이 달려있어 혹 익었는지 한 개를 따서 쪼개보니 아직 속이 퍼렇더란다. 그래서 얼른 던져버리고 나오는데 누가 '학생, 학생' 하고 부르길래 잽싸게 걸어와 감나무에 올라 시치미를 떼려고 했단다.

요즘이야 김서방네나 박서방네 모두가 쉬이 수박을 사 먹지만 그 시절에는 수박이 귀했다. 정말 수박이나 참외가 먹고 싶으면 금방 타작한 보리 두어댓 박을 퍼가지고 원두막에 가서 수박과 참외를 바꿔 먹곤 했다.

가끔씩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얼굴에 숯깜뎅이 칠을 하고 수박서리 참외서리를 하는 일도 있긴 했지만,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렇겠나 하고 덮어버리고 지나가는 것이 시골의 후한 인정(人情)이었다. 오늘날 그 하구리의 수박밭은 아파트 단지로 변했고, 그 맑던 개울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멱감던 친구들도 시나브로 떠나가니 남은 것이라곤 기억뿐이다./jjkim (photo naver file 인용)

*반공일(半公日): 주 5일 근무제 전에는 토요일은 오전만 근무나 수업을 했다.